유나은
유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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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속박

“가둬두면 돼?” 언제나 강시후 옆에 붙어 있는 하녀, 시종, 베이비시터. 그게 서아의 별명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시후를 짝사랑한 서아는 친구로 그의 곁을 머물며 지켰다. 유학을 간 시후에게 그의 부모가 붙인 감시자 역할인 것을 알아도 그의 곁에 있다면 행복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후 옆에 붙어 있어도 여자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는, 그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그냥 옆에 있는 ‘사람’ 정도일 뿐이었다. 결국 시후에게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서아는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1년 후. 서아는 시후의 동생 진후의 사정으로 가짜 약혼녀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런데. “결혼 상대가 필요하면 나와 해.” 강시후가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 게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짓들을 시작하는데……. “가둬두면 되냐고. 좋은 생각인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한 번 더 나쁜 짓

이복 언니의 욕설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건만, 매번 서영의 몸은 달달 떨렸다. 정세현 회장의 혼외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던 10년이 축복이었다. 비록 술주정뱅이 엄마 곁에서 자라야만 했지만, 그래도 이런 모욕과 수모를 당할 일은 없었으니까.원하지 않는 정략결혼을 앞두고 서영은 친구를 따라 파티에 갔다가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아주 순진하게도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면 결혼 후 첫날밤에 남편인 차정현이 제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이혼하자고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하룻밤을 보낸 그 이름 모를 남자가 하필 차정현이었을 줄이야.

한낱 비서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님.”유주는 차가운 도하의 시선을 피하며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죽을 때까지 나 따위는 다시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입주 도우미처럼 24시간 내내 곁에서 이사님을 보필할 겁니다. 도우미가 아니라 비서라는 게 다를 뿐이죠.”“그래?”“네, 이사님.”이죽거리는 도하의 물음에 유주는 침을 삼켰다.벌써 5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도하의 향수 냄새가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고 머리를 어지럽혔다.“상처받은 마음이야 치유됐다 쳐도 강유주만 보면 붙어먹고 싶은 건 여전한가 봐.”“무슨 말씀이신지…….”“너 이 집에 들어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철없는 도련님의 첫사랑 비슷한 걸 무참히 부순 데 대한 보복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토록 매정하게 구는 걸까.그것도 이렇게 잔인한 말로.“무슨 말씀을 하셔도 전 이사님 옆에 있을 거예요.” “어디 누가 먼저 항복할지 두고 보지.”마치 도전장을 건네듯 도하가 말했다.“말했잖아. 아직도 내 몸은 널 원해서 안달이라고. 어떡해도 내 곁에 있겠다며? 그럼 뜻대로 하는 수밖에.”

헤픈 사랑

대가는 20억이었다. 상사 서유건의 호적에 단 한 달만 이름을 올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서류상으로 혼인이 성립된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 남편이라는 남자가 직접 찾아왔다. “강 변호사였더군요, 나도 모르는 내 아내 말입니다.” 이미 각오했던 상황이었다. 당황할 것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 일을 받아들인 건 순전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상무님을 좋아했거든요.” 핑계치고는 뻔뻔했지만, 돌아온 그의 반응은 더욱 의외였다. “잘됐네.” “……네?” “귀찮은 일을 덜게 됐네요. 강재희 씨가 계속해요.” “계속이라니요?” 그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아내 말입니다. 이대로 쭉, 계속하라고.” * * *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날 배신하면 지옥을 보게 될 거라고.” “배신……이요?” “한 번 눈감아줬더니 겁이 사라졌나 보지, 강재희?” 재희는 서유건이 이곳까지 온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뭐라고 여기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그의 완벽한 삶에서 꺼져 줬으면 되레 좋아하며 파티나 열 것이지, 대체 왜? “우린 이미 남이에요, 서유건 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 재희야.” 얼음처럼 차갑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시작은 네가 했을지 몰라도, 끝은 내가 내.”

도액(度厄)

“제 주변 사람을 잡아먹는 놈이야, 저거.” 아홉 살 때 부모님과 형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열아홉 살에는 주헌이 살던 집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친구들이 숨졌다. 친인척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스물아홉, 이번 해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운명은 끝내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산속 깊이 숨겨진 암자를 찾았다. “살(殺)이 꼈군, 그래. 지독한 살이 꼈어. 본디 그대가 가진 기(氣)는 세다만, 그대 등 뒤에 붙은 저주를 떼어 내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아.” 선녀님이 주헌을 꿰뚫어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주헌이 이를 악물고 저주를 풀 방법을 묻자, 그녀는 기묘한 말을 던졌다. “이서우, 네가 이 사람의 부적이 되어야겠다.” * 이 집 안에서는 이서우는 존재 자체가 없는 사람이어야 했다. 방 안에서 조용히 지내고, 식사조차도 따로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 부적 노릇 하러 왔다면서? 그 용하다는 선녀님 손녀의 능력인지, 부적발인지 뭔지 한번 구경이나 하게 뭐라도 해 보지 그래?” “오늘 내 눈에 띄지 말아요. 피곤하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조용히 있어요.” 그래도 슬프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슬프지 않았다. 원래 부적이란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겨 놓는 법이었다. 서우는 한주헌을 위해 존재하는 부적이었으니, 이 정도 취급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