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없어요? 회장이 숨겼다는 아들.” 비쩍 마른 몸에 작은 키. 표정 없이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 관찰하듯 따라오던 새카만 눈동자. 기억 속 도련님은 그랬다. 그러니 못 알아볼 수밖에. 앞에 있는 완벽한 남자가 그 애라는 것을. 변한 게 어디 외모뿐일까. “내가 주임님을 우러러봐야겠어요?” “앉으시라고. 눈높이 거슬리니까.” 그는 가끔 치사했고, “키스하고 싶어요.” “이미 몇 번이나 했어요. 머릿속으로는.” 과하게 솔직했으며, “나는 우정이가 쳐다만 봐도 미치겠는데.” “주먹으로 내 턱을 갈겨요. 있는 힘껏.” 야하고, “먹고 버리면 다예요?” “책임져요.” 막무가내였다. 다시 만난 도련님은 사춘기 소년 같았다. 반항기 한복판에 서 있는, 설익은 사춘기 소년.
“결혼합시다.” 한가롭게 뱉어낸 말과 달리 그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장난스럽게 걸렸던 웃음기조차 전부 지워진 채였다. 다해는 눈가를 짚으며 실소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절로 흐른 헛웃음이었다. “뭘 해요?” “시간 낭비하지 말자면서요.” “그게 그런 뜻이…….” 남자의 이지적인 눈동자가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을 담았다. "나를 이용해요." 상식을 벗어난 남자는 표정이며, 목소리며, 저 눈빛까지도 농담 같지가 않았다. 은은하게 돌아 있는 게 더 무섭다더니, 다해의 눈엔 재경이 딱 그렇게 보였다.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결혼이 필요했던 남자. 이혼의 낙인을 원했던 여자.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끝이야 어쨌든, 시작은 그랬다.
‘헤어지자.’ 담담히 이별을 고한 김동희는 미련 없이 평주를 떠났다. 지겹다고 했다. 유치하고 시시해졌다고 했다. 선명히 기억한다. 덤덤한 눈빛, 조금 웃던 입술, 말끝에 찍힌 마침표 하나까지도. 빌어먹을 김동희. 어디서 뭘 해도 더럽게 잘 먹고 잘 살 독한 김동희. 김동희 후유증으로 7년을 정신병자처럼 살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묵영동에. “……김동희?” 한 번도 떠난 적 없다는 듯 초연한 얼굴을 한 김동희가 있었다. 처음처럼 여전히 예쁜, 나쁜 새끼 김동희가. “궁해?” 깎아내려도 깎이는 쪽은 나였고. “뭣도 아니라고 너.” 뭣도 아닌 게 될까 안달하는 것도 나였다. “키스를 마음으로 해?” “해 보자고. 마음 없이.” 그러니 잡배처럼 굴어도 결국. “나는 김동희.” 결국에는. “치과 의사가 네 잇몸 보는 것도 짜증 나.” 또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불가항력처럼 결국엔.
“나랑 모텔 가고 싶어?” 반말에 억지에 시종 무례한 백수건달. 도피하듯 내려온 고향엔 웬 이상한 남자가 있었다. “웃겨 진짜. 나도 촌놈이랑 엮여서 신세 망치고 싶진 않네요.” 엮이기 싫었던 앞집 촌놈은 이따금 고급 세단이 찾아오기도 하며, 검정 일색의 장정이 깍듯이 모시는 의뭉스러운 남자였다. “신세 망치고 싶지 않다며.” “그렇긴 한데…….” 정체도 모호한 그런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건 술김. “생각해 보니까 그래요. 여기서 더 망칠 신세가 있나 싶고.” 어쩌면 숨겨 왔던 흑심. “촌스럽게 굴 거 있어요? 젊은 남녀가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러나 꺼내기엔 두려운 진심이라 묻어 두려 했었다. 그랬는데-. “실수?” 그래야 하는데……. “난 꽉 막힌 촌놈이라 동정에 연연해. 의의도 두고.” 어제와는 다른 눈을 한 남자가 이상한 말을 한다. 그 눈빛엔 한심함도, 성가심도 없었다. 구박을 일삼던 이제까지의 남자는 없었다. “넌 실수인 걸로 해.” 아득히 검은 눈동자를 내리깔며. “난 하고 싶어서 했으니까.” 느슨한 웃음을 걸친 낯선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