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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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갈망

“숨 쉬어. 밤새 비서 잡아먹어서 졸도 시켰단 소린 듣기 싫으니까.” 거친 숨을 뱉어낸 남자의 서늘한 일침이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호기롭게 나선 주제에 고작 이거냐는 조롱거리에 유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다정한 말 따윈 하지 않는 그의 야속한 성정에 상처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입이 썼다. “기…절 같은 거 안 하니 걱정 마세요.” 뭉근하게 풀린 눈가에 힘을 준 유나가 애써 뱉어낸 말에 태준의 반듯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등줄기를 타고 오른 전율이 머릿속을 너저분하게 울렸다. 기껏 참아낸 눈물이 긴 꼬리를 달고 창백한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이제 상무님 눈에 제가 여자로 보이긴 하나요?” 늘 그렇듯 애가 아니라. 그 질문에 차태준이 황당하다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이게 어떻게 어린애 몸이야. 여자 몸이지. 많이 컸네. 민유나.” 목울대를 긁고 나온 저음에 담긴 감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유나는 그가 자신을 민 비서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게 뭐라고 좋았다. 비록 하룻밤 상대에 불과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는 남자의 품에 안겼으니. 그녀에게 그는 하늘이었다.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 그래. 그는 어른이었다. 어른답지 못한 이들만 보았던 유나의 일생에서 처음 보는 어른. 의지하고 싶고, 바라보고 싶고 곁에 있고 싶었다. 다시없을 황홀한 밤에 후회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기뻤다. 그토록 사랑하는 남자와의 하룻밤 기억으로 마침내 그를 떠날 수 있을 테니. 태어나 처음으로 가진, 지독하게 쓸쓸한 삶에 유일하게 가진 우아한 갈망이었다.

어디 감히 벗어나 봐

“애를 배더니 징징거림이 늘었네.” 네 달 만에 만난 전 남편이 비아냥 섞인 웃음을 흘리며 뇌까렸다. 모욕을 내던진 잘난 얼굴에 서서히 번지는 비웃음에 속이 욱신거렸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가 그토록 바라는 이혼서류를 남겨두고 집을 떠난 지 어느덧 네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나가요.” “아니… 좀 예민해졌나? 오랜만에 보는 남편인데 좀 반기는 척이라도 하지 그래.” 늘씬하게 잘빠진 다리가 꼬아지고, 그 위에 남자의 긴 손가락의 유려한 손이 겹쳐졌다. 나 좀 봐 달라고 빌 때마저 감흥 없는 눈으로 외면하던 남자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반듯한 입매를 느슨하게 풀고 웃었다. “내가 웃겨요?” “이런, 미안. 기분 나빴어?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털을 바짝 세운 게 좀 우스워서. 꼭 새끼 품은 고양이 같달까.” 고아하게 접힌 남자의 눈매가 일순간 매섭게 좁혀졌다. “아니지. 빌어먹게 웃긴 상황이잖아.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딴 놈이랑 붙어먹고 잠적해 버린 거. 기껏 찾아냈더니 딴 새끼 애를 밴 아내를 마주한 이 상황이 웃기지 않을 리가.” 지독하게도 냉랭한 음성이 떨어졌다. 상대의 심장을 구석구석 난도질하는 칼처럼 벼려진 음성이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우진의 서늘한 눈길이 예원의 도톰한 배를 힐끗 스쳤다. “그 배. 한 3개월쯤 되려나.” 온기 한 점 없는 시선에 전신이 바짝 굳고, 긴장감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절대 들켜선 안 된다는 마음에 예원은 표정을 단단히 했다. “내 애를 어떻게 하려고요.”  “어쩌긴 내가 키워야지. 당신 찾아오는 덤이라고 생각하면 나름 수지맞는 장사라.” 치마를 콱 움켜쥔 손끝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내리 깐 눈꺼풀 사이로 짐승 같은 검은 눈이 번뜩였다. “왜. 또 도망가려고?” “못 할 것 같아요?” 그 즉시 돌려준 대답에 서우진이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를 지어 보였다. 우아하게 늘어난 입매와 달리, 북풍의 것처럼 냉랭한 눈빛이 피부를 따끔하게 찔렀다. “어디 감히 벗어나 봐. 열렬히 잡아 줄 테니.” 나긋하게 권하는 음성과 달리, 황태자라는 별명에 걸맞은 우아한 미소를 띤 남자의 눈은 살벌한 빛을 띠고 있었다.

고귀한 이혼

“그만 개기고 돌아와. 네가 있을 자리는 내 옆자리야.”3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무심함으로 일관해 온 전 남편이 이혼 후 1년 만에 찾아와 한 말이었다.시연의 눈에 가로등 아래 음영이 서린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진 한 남자가 느릿하게 들어왔다.도무지 그녀가 아는 남편 같지가 않았다. 말투도 얼굴도 모두 낯선 이였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이 정도면 충분히 봐줬다고 생각하는데.”“당신이 뭘 봐줬는데요?”“차이석 여자가 다른 놈한테 고개 숙이는 것도 용납해 줬잖아.”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저를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직시하는 눈길에 닿는 곳이 뭐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우린 이혼했고 전 이제 제 인생이 있어요. 취업도 했고 내 생활이란 게 있다고요.”“그러니까… 남들 하는 거 원 없이 해봤으면 된 거 아닌가?”곧게 뻗어진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고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이 움찔 떨렸다.턱을붙든 힘에 얼굴이 얼얼했다. 제게 관심 한점 없던 남자가 오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일이 하고 싶었던 거라면 내 옆에서 해. 나한테 숙이라고.”전 남편이 찾아왔다.내 고귀한 이혼을 망가뜨리려.

아내의 유산

이혼하고 그 집을 나온 지 벌써 세 달이 지났건만. 잊고 지냈던 그 남자가 갑자기 꿈에 나왔다. 상념을 털어낸 희주는 열 명 남짓한 아이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선녀는 예쁜 아이 셋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어 하늘로 올라가는 삽화를 보여 주자, 터져 나온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에 희주의 입가에도 미소가 고였다. “와. 해피엔딩이다!” “자 그럼, 다음 이 시간에는 더 재미있는 동화로 우리 다시 만나요.” “손생님, 바이바이!” 하나둘 엄마 손을 잡고 떠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막 일어날 때였다. 맨 앞줄에 앉은 아이 하나가 요지부동이었다. “려미야. 왜 그러니?” “…나무꾼은요?” “…응?” “아빠눈 왜 안 데리고 가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려던 희주의 손끝이 살짝 경직됐다. “나무꾼은 도망간 선녀를 끝까지 찾아갈 거야.” 려미의 훌쩍거림 뒤로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가 희주의 귓가를 예민하게 울렸다. 꿈에 나와 하루 종일 희주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그 남자. 잘 재단된 슈트를 입은 그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폭으로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덜커덕 심장이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려미에게 잠깐 향하던 유순한 눈길이 굳어 버린 희주에게 느릿하게 닿았다. 사뭇 예리한 눈동자가 경직된 희주의 몸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더군다나 내 애새끼를 밴 여자라면.” 흠칫 어깨를 떤 희주가 급하게 내려보낸 손으로 배를 숨기듯 감싸 안았다. “안 그래. 은 희주?” 나른하게 질문한 강윤이 입술 끝을 당겨 올렸다.

불완전 계약

5년을 사귄 남자 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 날, 그 자리에서 이별을 고한 서희는 난생처음으로 만난 낯선 남자와 일탈을 한다.하룻밤 불장난 같은 남자와 다시 볼일 없을 거라 여겼지만, 며칠 뒤 운명처럼 회사 상사로 조우하게 되는데.별안간 뻗어진 남자의 팔이 그녀의 왼쪽 뺨을 스치며 벽을 짚었다. 한층 가까워진 그의 입술이 야릇하게 움직였다.“내 생각 안 했어요? 난 주말 내내 그쪽, 아니, 이서희. 당신 생각만 했는데.”***“앞으로 저 담당자가 오면 저랑 연인인 척해 주세요.”“전 남자 친구 앞에서 날 이용하시겠다?”본부장의 짙은 한쪽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쌍꺼풀 없는 눈매 또한 가늘게 변하자 왠지 등줄기가 서늘했다.조각상 같이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좋습니다.”생각보다 간단히 나온 수락에 어리둥절해진 것도 잠시.“그 대신.”그가 짧게 말을 끊고, 그녀를 그윽한 눈으로 응시했다.“계약서 쓰죠. 계약서를 쓰는 만큼 조건은 확실하고 충실히 이행하는 거로.”“좋아요.”한 점 의심 없이 동의했던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계약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덫이 될 줄은.“저희 계약 이제 끝내요.”남자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아주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옅은 조소를 베어 문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뇌까렸다.“순진하네. 우리 계약에 종료 일자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어.”차갑게 웃으며 불완전한 계약을 들이미는 남자에게서 지금껏 본 적 없는 음험한 집착이 넘실거렸다.[본 작품은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