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라
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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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인 청혼

“퇴사하고 싶습니다.” 연우는 후회했다. 한시도 태연하지 못하는 저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태한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생명이 생겨버렸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서 비서, 많이 컸네.” “사장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와 상관없어요.” “상관이 왜 없어. 나랑 잤잖아, 너. 세 번이나. 아니, 아침까지 네 번인가?” “사장님!” 와락 소리친 연우의 얼굴이 뜨겁게 타올랐다. 반대로 더 고고해진 태한은 턱을 치켜들었다. “날 먹고 튀겠다니, 꿈도 야무지네.” 그의 눈동자 속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그렇게는 안 돼.” 태한이 검지를 들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밤새 생각해. 이성적으로.”

뒷결혼

“밤새 네 음기가 모인 속옷이어야 한다.” 도화살이 많은 사주를 갖고 태어난 서하는 음의 기운을 소멸하기 위해 불길 속에 속옷을 던져야 했다. 수치심을 넘어 존엄성마저 무너지는 일이지만, 현이재에서 버텨야 하는 서하는 이를 견디며 살았다. 그녀에겐 평생의 목표가 있었다. 그를 위해 현이재의 주인 차강현이 필요했다. “제가 되어 드릴까요? 상무님 결혼 상대요.” “윤서하 씨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고의 환경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남자. 아무렇게나 시선을 주어도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는 차강현 앞에서 서하는 자꾸 목이 멨다. “자격은 만들면 되죠.” “까부네.” 그러나 날 선 눈빛에 심장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찰나에 드리웠던 감정은 저를 향한 경멸이었다. “윤서하 씨는 돈만 주면 누구하고든 결혼하나 봅니다.” “상관없는 일이니 관심 거둬주세요.” “왜 상관이 없어. 네가 먼저 찔러본 게 나잖아.” 기분 탓일까, 그가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난 밤낮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인데, 그래도 괜찮겠어?”

남편이 아이를 숨겼다

“더 안아주세요. 아, 아무 생각도 안 나게…….” 일생일대의 일탈을 함께한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도백주의 신입 비서가 되어. “처음 뵙겠습니다.” 뼈와 살이 녹는 밤을 보내놓고 초면인 체하는 유영에겐 어린 아기가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서유영이 나타난 진짜 이유. 그녀는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천하의 도백주 아이를 가진 거다. “하, 근데 나를 모른 척까지 하시고?” 그녀에게 음흉한 계략이 있음을 알게 된 백주가 어금니를 질끈 사리물었다. 그런데 왜……. “압, 빠.”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걸까. 저 앙큼한 여자가 어떤 협박을 해올지 모르는데 가슴이 뛰는 건지. “내가 장담하는데.” 그는 긴 호흡을 뱉으며 유영과 눈을 맞췄다. “너 날 좋아해.” 정면으로 파고드는 눈빛은 어느새 선명한 사랑이었다.

친구란 이름 뒤에

12년 전 떠난 첫사랑 지해범이 나타났다.여전히 멋있는, 아니 더 성숙한 ‘남자’가 되어.을의 연애를 자처하던 우주는결혼식을 두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배신당하고.때마침 12년 만에 돌아온 해범은지금껏 친구란 이름 뒤에 숨겨 온 진심을 드러내는데…….*“밤새 생각해 봤는데.”차분하게 운을 떼는 그에게 묘한 불길함을 느낀 우주가 느릿하게 눈을 들었다.지해범은 자타공인 모범생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를 좋아했지만, 그녀만 아는 성격이 하나 있었다.“일단 난 결정했다는 것부터 말해 둘게.”그건 바로 한번 꽂히면, 그게 뭐가 되었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직진한다는 것.“네 남자 친구, 내가 해 줄게.”“……뭐?”해범은 조금 전까지 유지하던 자세를 거두고 특유의 표정으로 검은 눈을 일렁였다.“물론, 남편도 가능해.”우주의 입에서 뜨거운 커피가 주룩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