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해 거액의 사채 빚을 떠안고 종적을 감추고, 거리로 나앉은 가족의 생계와 빚을 해결해보려던 오빠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엄마까지 쇼크로 쓰러지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유주의 어깨로 떨어졌다. “1년 어학연수 다녀온 셈 치면 돼요. 어머니 병원비는 물론 빚도 해결될 겁니다. 젊은 아가씨니까, 몸도 금세 회복될 거예요. 아가씨만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결혼을 한다 해도 남편은 모를 겁니다.” 유복하고 단란했던 가정환경, 성실함을 인증하는 생활기록부와 상위권 대학생이란 신분. 열심히 살아온 이력이 이런 면접에 쓰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장을 찍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해결책을 구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계약된 세 번의 밤, 안대로 눈을 가리고 그 남자를 받아들이면 된다. 아이만 낳아주고 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이는 안 낳겠다더니 혼인 신고는 바로 했어, 맞아?” 결혼식 대신 혼인 신고, 애초부터 그렇게 걸려 있던 조건이었다. 설마… 몰랐나? “아이부터 낳으라시는데, 혼인 신고는 당연히….” 설마 회장님, 당사자 동의도 얻지 않고 하신 건가…. “어제 나에게 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잖아? 애 갖고 싶지 않았으면 최소한 혼인 신고는 하지 말았어야지.” 안다. 그의 말에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어른들이 하겠다고 나선 일을 내가 어떻게 막아. 이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혼인 신고까지 했으면 그 빌어먹을 최선, 더 열심히 해야겠네. 안 그래?”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선택권은 없었다. 이수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가 눈썹을 치뜨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이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