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없는 부부가 있기는 할까? 복수를 위해 원수의 아들과 결혼한 여자와 그런 아내의 비밀을 품어 주는 남편. 비밀을 가진 자들이여, 사랑을 지키려면 침묵하라. *** 갑작스러운 사고, 그리고 원인불명으로 잔인하게 불타버린 엄마, 아빠. 그 죽음의 배후에 GK그룹 윤기태 회장이 있다는 추측만 있을 뿐. 채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윤기태의 손자, 시유의 입주 튜터가 된 채이. 그저 작은 실마리라도 잡기 바랐을 뿐인데. “이제 선생님에게 비밀을 만드는 게 싫어졌어요.” “비밀이요?” “네. 마음을 억지로 숨기는 것도, 몰래 선을 보는 것도 싫어요.” 윤기태의 아들이자 시유의 삼촌인 이한의 마음을 얻는 채이. 제 아비와 달리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한에게 채이 역시 흔들리지만, ‘네 아버지 한마디에 우리 엄마, 아빠가 불타 죽었어!’ 결국 진실을 마주한 순간 알게 됐다. 이한이라는 멋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사랑에 빠진다 해도 출발부터 거짓이었던 이 관계에 해피엔딩은 없다는 것을……. ‘그래, 윤이한. 너만의 완벽한 신부가 되어 줄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잔인하게 윤기태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채이는 기꺼이 지옥을 향해 제 몸을 던지기로 했다.
약혼 상대의 비서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정략결혼을 앞둔 여자의 일탈 정도라고 해두죠.”태어나 처음으로 욕망에 솔직해지며 인생 최고의 황홀함을 맛봤지만,주어진 삶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지 못한 아라는 끝내 거짓말로 은호를 밀어낸다.사실은 고백하고 싶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많이 끌렸다고.예쁜 카페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도 보러 가고 싶다고.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아라는 은호에 대한 마음을 숨긴 채 팔려 가듯 결혼하지만…….‘이 향은…… 그리고 이 느낌, 이 감촉도.’끔찍할 줄만 알았던 남편의 몸에선 익숙한 단내가 풍기고,비참할 줄 알았던 침대 위는 찬란했다.마치 그 남자와의 한때처럼.“당신, 도대체 누구야?”“누구긴 누구야, 네 남편이잖아. 네가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했던 김도민.”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는 남자 앞에서 아라는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커지는 행복만큼 더 커지는 의심을 외면하면서.
“……이혼해요.”서하가 제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던 단어를 간신히 입 밖으로 밀어냈다.“풉.”저런 걸 비웃음이라고 하는 건가?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만큼 위압감이 느껴지는 남편을 향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용기를 냈지만, 돌아오는 건 비틀어진 입매에서 나오는 조소뿐이었다.그 흔한 카페나 영화관 데이트도 못 하고 치러진 정략결혼일지라도 한번은 사랑이란 걸 받아 보고 싶었는데…….이건이 대꾸도 없이 변호사를 통해 바로 이혼을 진행했다.“당신에게 결혼은 비즈니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군요.”“지금 당신 아버지가 하는 꼴을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길고 깊고, 또 아름답기까지 한 남편의 눈이 자신에게 채 1초도 머물지 않고 차갑게 식어 버리자 서하가 헛된 망상을 버렸다. * *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이건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기억 속 새까만 소녀는 늘 찬란히 빛나는 존재였지만 김서하는 누구보다 어두운 사람일 뿐이니까.하지만 가당치도 않았던 그의 생각이 차츰 무너졌다.이혼 조정 기간 중 아내와 단둘이 외딴 섬에 갇히고 나서야…….
“넌 딱 그 맛이야. 어릴 적 몰래 까먹던 싸구려 불량식품 같은 맛.” 턱을 그러잡고 작정한 듯 모멸감을 주는 그의 말이 오늘따라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된다고 해야 할까? 불량식품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의 그 말은 꼭 저를 숭배한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 * *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설공푸드의 고용인으로 들어간 예주, 그곳에서 지난밤 2억짜리 위스키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 주던 재하와 마주친다. “도둑고양이가 제 발로 들어왔네?” 예주를 부잣집 딸인 척하며 도둑질이나 하는 여자로 오해한 재하는 고용인으로 들어온 예주를 무시하며 그녀 위에 군림한다. “빚은 내가 갚아 주지. 대신 내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벗어.” 아버지의 사채를 갚아 주는 조건으로 계약 만남을 제안한 재하는 예주를 집안 여기저기서 탐하고, 이미 그에게 마음을 뺏긴 예주는 치욕과 동시에 절정의 쾌락을 맛보며 그를 매몰차게 밀어내지 못한다. “당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죽었어.” 사기죄로 구속됐던 예주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감옥에서 사망하고, 예주는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게 재하라고 확신한 채 그의 곁에서 달아난다.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며……. * * * “내가 아직도 불량식품으로 보이나요?” 사라졌던 예주가 3년 만에 화려한 모습으로 재하 앞에 나타나고, 예주를 찾아 헤맸던 재하는 초췌한 눈빛으로 그녀를 맞이한다.
“이제 키스 정도는 해 줘야 할 타이밍 같군요.”밖이 다 비치는 리넨 커튼을 닫은 은상이 몸을 돌렸다.“계약서에 그런 조항은 없었잖아요?”키스라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았지만 다행히 은상의 고개는 아직 창문 너머로 향해 있었다.“수정하겠습니다.”단호하고 짧은 대답이었다.은상의 오른손이 영서의 허리를 깊게 감아 몸을 돌렸고, 영서의 등이 유리창에 닿았다.“어깨에 손을 얹어 볼래요?”“이렇게요?”“좋습니다.”달콤하지도, 부드럽지 않은 은상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에 잠시 머무르다 떨어졌다.“보여 주는 건 여기까지입니다.”여린 손목을 잡아챈 은상의 손이 영서를 침실로 이끌었다. 까만색 암막 커튼이 창문을 완전히 다 가린, 커다란 침대가 있는 그곳으로.* * *“오빠가 꼭 데리러 올게.”“진짜지? 약속.”보육원에서 친남매처럼 자란 서준과 채린.도강 그룹의 혼외자였던 서준은 불순한 의도에 의해 친아버지의 호적에 들어가고, 채린 역시 학대 가정에 입양되면서 둘은 원치 않는 이별을 한다.15년 만에 서준과 채린에서 은상과 영서가 되어 만난 두 사람.영서는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은상이 서준 오빠임을 알아채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에 좌절한다.“더러워.”버림받은 오빠와 보낸 욕정의 밤이 끔찍했다. 지옥이 이것보다 더할까?뜨겁게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을 잠근 영서가 뿌연 거울로 흠뻑 젖은 자신을 바라봤고,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여자가 서 있었다.이 더러운 여자를 누가 알게 될까 두려워 어서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도은상에게 김채린이라는 여자아이는 없었으니, 김서준에게 이영서라는 여자를 보일 수 없으니. 그러니 떠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