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인내할 수 있었다. 그 일을 알기 전까진. *** “깨어난 거 알아. 이은강. 이제 일어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 볼까?” 태오의 목소리에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숱 많은 속눈썹이 슬며시 들어 올려지며 밝은 다갈색의 눈동자가 오롯이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당신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구나. 그래. 난 이렇게 숨길 수가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내게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아빠 회사 부도난 거, 그거 당신 짓이었어? 어떻게 우리 집을, 우리 아빠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나랑 살을 맞대고 살 수 있었던 건데?” “……!”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은강에게는 쉽게 읽혔다. 찰나의 순간 태오의 눈빛이 동요하듯 흔들렸다.
친부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온 유림. 차기 대선 후보인 친부가 HK 그룹과 혼맥을 이으려 하자 그녀는 그룹의 차기 후계자 차도현에게 접근한다. *** 모든 게 순탄히 흘러가고 있다고 자만했다. 그가 내민 결혼 유지 계약서를 열어보기 전까진. "이 네 번째 조항, 무슨 뜻이에요?" '서유림이 차도현에게 접근한 목적을 밝힐 시 위 조건들을 모두 무효화 시킬 수 있다'는 조항. 유림의 검지가 정확히 그곳을 가리켰다. "말 그대로야. 서유림이 쓸 수 있는 마지막 보루 정도라고 해두지. 물론 난 이 계약이 평생 지속되길 바라지만 말이야." "목적이라니. 잘 못 짚었어요." "그러지 말고 털어놔 봐. 혹시 모르잖아? 복잡한 네 머릿속 내가 한 큐에 해결해 줄지." "……." 이 판을 짠 것도 판을 손에 거머쥐고 있는 것도 분명 저인데, 왜 차도현 앞에만 서면 자꾸 그에게 말려드는 느낌일까. 유림은 도현의 말에 아랫입술을 잘게 씹었다.
갚아도 갚아도 줄어들지 않는 아빠의 빚 3억.그 빚쟁이의 삶이 지긋지긋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상대가 공 비서라면 그 결혼, 한번 생각해 볼 참인데.”상사 정로건에게 보상해야 할 돈 3억 8천까지 생겨 버렸다.“대답해. 나랑 결혼할래, 3억 8천 물어내고 사표 쓸래.”그렇게 시작된 게이 상사와의 2년짜리 계약 결혼.처음엔, 분명 그랬다.* * *로또 1등이라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아 깔끔하게 빚 갚고! 계약 결혼 기간을 단축해 내 갈 길 가자! 했는데…….오만하기 그지없던 남자가 갑자기 잘 지내보자며 손을 내민다.“소화제야. 또 집에 가서 아프다고 징징대지 말고 먹어 둬. 우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은근슬쩍 챙겨 주기까지? “잘까?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든지. 몸은 거짓말 안 하거든.”아니, 여자랑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면서요.심지어 게이라면서요?!그런데 갑자기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요!이제 각 잡고 새 인생 시작하려는 제 앞에.정로건이 저와 결혼 생활에 진심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요즘 이러고 살아?” 애틋한 첫사랑이자 외면하고 싶은 악몽. 가난한 법대생이었던 도강우는 희수에게 그런 남자였다. “조건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지, 희수야. 애 셋 딸린 홀아비라니.” “…….” “그 고매한 공주님 자존심은 개나 줬나 봐?” 의붓아버지의 명에 따라 선 자리를 전전하던 희수는 우연처럼 그와 재회한다. 다시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자존심은 없으면서 수치심은 남아 있는 건가.” 경멸 어린 눈동자. 웃는 낯으로 퍼붓는 조롱. 완전히 변해 버린 그가 바라는 것은 희수의 불행뿐이었다. “사람 갖고 놀다 버리는 거.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어졌거든. 어떤 기분인지.” “나랑 다시 엮이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나 본데.” “…….” “말했잖아. 넌 그냥 장난감일 뿐이라고. 갖고 놀다 지겨워지면 언제고 버려지는 싸구려 장난감.” 희수는 죄책감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남자에게 정처 없이 휘둘리고 만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7년 전의 진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있었어요. 당신은 영원히 모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