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혼, 제가 하죠.” 가족의 욕심으로 원치 않던 약혼을 하게 된 은서. 도살장에 끌려가듯 입장했던 약혼식장에 뜻밖의 남자가 나타난다. 과거에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이자 자신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남자. 백산 그룹의 장남 세준이. “세, 세준 씨는 이미 다른 분과 약혼했고…….” “넌 내 이복동생과 붙어먹으려 했고.” 도대체 왜 다시 돌아온 걸까. 은서는 애써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는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욱 거세게 죄여 온다. “난 완벽한 정략결혼이 필요해, 은서야. 애새끼 하나 낳아 주면 더 좋고.” “선배…….” “이 관계에 책임이 있는 건 너야. 내가 아니라.”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이미 그의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본 그는 비난마저도 완벽했다. “쉬운 건지, 익숙한 건지.” “아니, 아니에요.” “하긴. 처음부터 헤프게 붙어먹길 좋아했지.” 타인을 짓밟는 데 도가 튼 남자, 도신재. 그의 아내로 살고 싶어서, 죄책감을 자극하는 주위의 협박과 차게 식은 침대 위에서 홀로 삼키는 눈물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우희. — 그만 관두지. 둘의 결혼은 결국 냉랭한 전화 한 통으로 끝났다. 참으로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우희는 그 순간만큼은 울지 않았다. 대신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침대에 도로 누웠다. 모든 것을 잊고 아이를 위해 좋은 꿈을 꾸고 싶었기에. * * * 4년 후. 신재는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무참한 심정을 감추고 싶기라도 한 듯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왜 내게 알리지 않았지?” 낮게 떨리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우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알렸다고 한들, 당신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그래도!”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믿어 줬을까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신재는 부정할 수 없었다. 목에 맨 타이가 밧줄처럼 죄어드는 착각에 숨이 막혔다.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겨우 꺼낸 말에 차가운 거절이 돌아오자, 신재의 길고 곧게 뻗은 눈매가 엉망으로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