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수명이 다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몰락뿐이로다. 이곳은 누구의 구원도 없는 멸망이 선고된 세계. 죽음과도 같은 잠의 골짜기를 지나 눈을 뜬 이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잠들었는지 모든 기억을 잃은 그는 혼란스럽다. 설상가상 그가 깨어난 곳은 조금씩 부서져 가는 하늘 위의 성으로, 그 성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수상한 미남자뿐이다. “……내가, 너랑…… 친했나?”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해?” “어떤…… 사이?” “난 기억을 잃은 너도 좋아.” 자신을 아뉘스라고 밝힌 남자는 이상하리만치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엔이 그런 아뉘스의 다정함에 점차 물들어 갈 무렵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게 되고, 세상은 시시각각 어둠이 닥쳐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네가 나를 지켜 주었거든. 네가, 나만을.” 그 말을 다시 한번 이룰 시간이 왔다.
“깃발을 올려라, 출전이다.” 폭풍이 몰아치는 시기, 여신의 가호를 받는 왕국 타말라그는 제국과 한창 전쟁 중이다. 여신의 현신이자 타말라그의 수호자인 임페리알들은 최전선에 투입된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전쟁터에서 죽음으로써 임페리알로 각성한 아유이르자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여왕의 무기이자 ‘죽음’ 그 자체이기에. 새카만 어둠을 가르고 번쩍이는 번개의 빛, 우레의 울부짖음, 요란한 빗소리, 비행선의 심장 소리.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으니 더없이 선명하던 것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언젠가 저 빗줄기에 씻겨 내려갈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아유이르자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때, 그 상념을 깨듯이 새의 울음소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가 물었다. 첫 번째 임페리알이자 타말라그 왕국의 총사령관 이리케디스. 1년 만에 돌아온 그에게서는 낯선 바람이 느껴졌다. 그가 잡았던 손의 온기, 그의 숨결이 얇은 살갗을 넘어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와 닿는 것만 같다. 마치 독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 아유이르자르.” “안녕, 이리케디스…….” 죽음조차 침범하지 못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에갈드 제3기지 소속 이븐 아이지스, 출전합니다.” 고대 제국의 유적을 두고 일어난 전쟁에 참전 중인 이븐은 최전선을 지키는 기갑기사다. 한밤중 유적지를 탐색하던 그는 이변에 휘말려 정신을 잃고, 사라진 줄 알았던 제국의 황성에서 눈을 뜬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성에 들뜬 것도 잠시, 천 년간 잠들어 있던 제국의 주인 황제를 깨우게 되는데. 그가 위험천만한 계약을 제안해 온다. “그대가 나를 도와준다면 나 또한 그대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제의 ‘호의’를 감히 거절할 수 없던 이븐은 황제의 손을 잡는다. 그리하여 살얼음처럼 위태로운 여정에 동행하게 되는데……. 그는 전설의 한 자락을 엿보며 당혹하거나 불안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조금 들떴다. 과연 어디까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븐은 잘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 비밀 많은 계약자에게 끌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