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빛무리가 번짐과 동시에 세계 각지에 게이트가 열리고, 괴생명체의 습격이 시작됐다. 이 세상에 미련 한 톨 없던 나는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오히려 인상적인 죽음 같았다. 분명 그랬는데,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 한 남자가 깔려 있었다. “……지금 그쪽도 위험한 거 알고 있습니까?” 그는 내게 가라고 했지만, 죽음 앞에 와서까지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위기의 순간, 나는 인류의 첫 에스퍼로 각성한 그 남자에 의해 살아남았다. 그러다 국민을 안심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부에 의해 그와 3년짜리 계약 결혼까지 하고 말았다. 약속한 3년 후, 에스퍼와 가이드가 늘어남에 따라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도입되었고, 월등함을 입증하듯 그는 최초의 SS급 에스퍼였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최초의 F급 가이드라는 선고가 내려졌다. * * * “……우리 이혼, 할래요?” 나를 끌어안은 몸이 돌연 조각상처럼 굳어 단단해졌다. “우리가 약속했던 시간이 오늘부로 끝났어요.” “…….” 그는 말이 없었다. 사방에 흐르던 냉기는 가시지 않고 오히려 짙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당신은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인페르나와 살바토르 간의 치열한 전쟁이 발발했다. 소령이라는 직급으로 살바토르군을 이끄는 허레이스 허버트 그렌펠 공작과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남자아이인 척 살아남은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이별. 8년 후 그들은 비로소 다시 만났다. 소령과 소년이 아닌 공작과 숙녀로. *** 끼이이익, 쾅! 문이 조금씩 열리다가 갑자기 큰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졌다. 한 남자가 재킷을 손에 쥔 채 뚜벅뚜벅 걸어왔다. 사내의 오른쪽 눈은 잿빛이었다. 그래, 오래전 사샤가 빗물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한, 바로 그 눈이었다. “소령, 소령 아저씨!” “……넌, 누구지?” 그제야 사샤는 제 입장을 깨달았다. 아직 그는 사샤가 여자아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황한 듯 눈가를 파르르 떨던 사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잠시간 말을 골랐다.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도무지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 맞아요. 제가, 공작님께서 거두어 주셨던 그 아이 사샤예요.” 결국에는 모든 걸 실토하고 말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벌이야. 정숙한 숙녀가 되지 못한 벌.” 그와 생각지도 못하게 가까워지고 말았다. 지나칠 정도로.
고교 졸업 이후 8년을 개처럼 굴러 이 자리까지 올랐다. KG그룹 이동만 회장의 막손 이연아는 식품업계의 최종 실세가 되기까지 고작 한 걸음 남짓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정말 돌아가신 어머니의 복수 역시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단 한 걸음이 삐끗했던 어느 날 그녀가 과로로 쓰러진 걸 안 이동만 회장이 연아를 자신의 오랜 벗 박만수의 시골집 홍예마을로 보내 버린다. 한가로운 시골 풍경에 막막함이 몰려온 것도 잠시, 그녀는 디저트 개발을 위해 애타게 찾던 신품종 배 '만황' 과수원을 발견하곤 곧바로 사장을 찾아가는데 당장에 계약을 따 내고자 혈안이 되어 있던 그녀에게 달걀로 바위 치는 것처럼 무심한 사내가 걸렸으니, 그는 평화롭고 윤택한 해피 농촌 라이프를 방해하는 것들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박태승이었다. 티격태격, 처음부터 맞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친해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자꾸만 그에게 시선이 가는 걸까. * * * “어디야.” ‒ 네? “어디냐고. 지금 갈게.” ‒ 아니에요. 지금 안 돼요. 와도…… 태승 씨? 일어선 태승이 물결치는 메밀꽃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려 반짝거렸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 당신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