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를 이용하겠다고 하는 거다. 나의 복수를 위해서.” 황제 칼리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방 귀족의 딸, 루시트를 이용하고자 했다. 루시트는 이에 흔쾌히 응했다. 그녀에게도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 “제가 황비가 되어 폐하의 복수를 돕겠습니다. 대신 목적을 이루시면 저와 이혼해 주세요.” 제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이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수도원에 처박히는 수녀가 되거나 이혼녀가 되거나. 루시트는 황제의 이혼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국혼을 치른 그날 밤.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침대를 가리켰다. “폐하. 의무를 다하세요. 저도 황비로서 응해드릴 테니 잔말 말고 어서 침대에 오르시지요.” 칼리드는 멈칫했다. 오늘 낮, 정식으로 황비에 오른 이 여자는 자신보다 키가 한 뼘 이상 작은데도 기백이 상당했다. * * * 이 정도면 제법 좋은 협력관계였다.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받을 것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약속을 지켜달라는 말에 칼리드의 눈빛이 이글거리는 걸 보기 전까지는. “이혼해 줄 수 없어. 네가 날 떠난다는 것 또한 허락하지 않겠어.” 대체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루시트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폐하! 복수하면 이혼해 준다며!”
세상에 이보다 더 난이도 높은 빙의는 없을 거다. 반역에 연루되어 등장하자마자 죽는 엑스트라인 것도 억울한데, 미완결 외전이라 이후 내용도 모른다. 빙의된 인물의 기억도 능력도 없는데, 눈 뜨자마자 끔살 엔딩의 도입부라고?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지! 하지만 원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달라. '나는' 살아야겠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영애는 백작을, 그대의 아버지를 배신하는 건가?” “예!” 기다렸던 질문에 신속한 답변과 맹렬한 끄덕거림으로 응하자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욱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날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내 유일한 생명줄, 아펠리온 대공을 바라보며 쇠창살을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저를 대공 저하의 노예로 삼아주십시오!” “잘도 그런 소리를 부끄럽지도 않게…” “제 미모가 훌륭하다 하여 저를 취하신다 하시지요!” 그의 붉은빛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데굴데굴 떨어질 듯 커졌다.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혼자만 생존물 모험 판타지 찍게 된 나. 과연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대공은 자신이 입고 있던 붉은 가운을 벗어 내렸다. 얇은 셔츠 위로 탄탄한 가슴팍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젊은 남녀, 늦은 밤. 풀어헤친 옷과 물기를 머금은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 그리고 침대…. 대공의 얼굴이 점차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은 설마… 아니 이건! 나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한 채 살며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저, 저기, 이게….” “조용히.”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세상 단호했다. 이거 로맨스 판타지였어?! 여전히 혼돈 가득한 상황에서 나는 절규했다. 제발 장르 정립 좀 하자고!
라트리안은 헤일리를 정신 나간 여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헤일리 또한 라트리안을 재수 없는 양아치 새끼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억울할 것은 없었다. * * * 황금의 길을 열었던 바다의 패자, 마르트 공화국에서 귀족은 가난할 수가 없었다. 단, 헤일리 페를로를 제외하면. 공화국 최초로 ‘가난뱅이 귀족’이 된 헤일리는 가문이 몰락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보수가 높기로 유명한 아크렌더가의 부관이 된 것까지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상관이 라트리안 디엔 아크렌더라는 건 크나큰 비극이었다. 그는 세상 모든 걸 내려다보는 오만함에 더해, 사람 머리 위로 와인을 들이붓는 성격파탄자였다. “머리는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그따위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당장 내 집에서 꺼져주지 않을래?” 부관으로 지내는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신경을 거스르는 상관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기어이 뺨을 내리치기까지 했으니, 그도 당연히 자신을 싫어할 거라 믿었다. “널 좋아하게 된다면, 난 미친 게 틀림없어.” 헤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이 웬일로 맞는 말을 하지? 웃으려던 순간. “그런데, 난 기어이 미쳐버린 거 같아.” 이어지는 고백에 웃음이 멎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 올려다본 그의 눈빛이 낯설었다. 집착이라기엔 애틋하고 사랑이라기엔 격렬한 시선이 제 모습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헤일리는 알지 못했다. 도망친 자신을 찾기 위해, 라트리안이 어디까지 할 수 있었는지를.
세상에 이보다 더 난이도 높은 빙의는 없을 거다.반역에 연루되어 등장하자마자 죽는 엑스트라인 것도 억울한데, 미완결 외전이라 이후 내용도 모른다. 빙의된 인물의 기억도 능력도 없는데, 눈 뜨자마자 끔살 엔딩의 도입부라고?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지! 하지만 원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나는' 달라. '나는' 살아야겠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라도! “영애는 백작을, 그대의 아버지를 배신하는 건가?”“예!”기다렸던 질문에 신속한 답변과 맹렬한 끄덕거림으로 응하자 눈앞에 있는 남자는 더욱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날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나는 내 유일한 생명줄, 아펠리온 대공을 바라보며 쇠창살을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저를 대공 저하의 노예로 삼아주십시오!”“잘도 그런 소리를 부끄럽지도 않게…”“제 미모가 훌륭하다 하여 저를 취하신다 하시지요!”그의 붉은빛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데굴데굴 떨어질 듯 커졌다.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 혼자만 생존물 모험 판타지 찍게 된 나.과연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대공은 자신이 입고 있던 붉은 가운을 벗어 내렸다. 얇은 셔츠 위로 탄탄한 가슴팍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젊은 남녀, 늦은 밤. 풀어헤친 옷과 물기를 머금은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그리고 침대…. 대공의 얼굴이 점차 내 앞으로 다가왔다.아니… 지금 이 상황은 설마… 아니 이건!나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한 채 살며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저, 저기, 이게….”“조용히.”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세상 단호했다.이거 로맨스 판타지였어?! 여전히 혼돈 가득한 상황에서 나는 절규했다. 제발 장르 정립 좀 하자고!
하인델 후작 영애 아실레트. 아름답고 정숙하여 제국민의 칭송을 받던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남자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내 모든 걸 주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딱 한 명만 죽여주시면 됩니다.” 복수의 대상은 셋, 그러니 필요한 남자도 셋. “누님, 저는 오직… 누님만 있으면 돼요.” 날 팔아넘긴 아버지를 막아줄 방패.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나를 이용해도 됩니다.” 날 이용한 남편을 벨 검. “네 계획이 뭔지 말해봐. 그게 무엇이든 내가 그리던 그림 안에 있을 테니까.” 날 망친 황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대적자. “남자에 미쳤군요.” “천박해요.” “그 아실레트의 추락이라니, 쯧쯧.” 모두가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찬미하던 아실레트. 그녀는 이미 죽었답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