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런은 유리스의 빛이었고, 유년 시절 그 자체였다. 그녀는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가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자신을 밀어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나, 이달 말에 결혼해. 그러니 더 이상 날 찾지 마. 마지막으로 부탁하지.” 건조한 음성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움도 없었다. 그저 심심한 뉴스거리를 전달하듯 차분한 음성일 뿐이었다. *** 상실감에 젖은 유리스는 정략결혼 상대인 체인트를 사랑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변함없는 고목처럼 아내를 사랑했다. 유리스가 소꿉친구에게서 받은 상처로 아파해도, 악몽 속에서 카일런의 이름을 불러도,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지 않아도. 갑자기 일어난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남편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며, 사랑하는 모국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리고 유리스는 짙은 후회 속에서 죽었다. 그런 줄 알고 눈을 떴다. 지극히 평화로운 8년 전의 어느 봄날에. “유리스, 아직도 자?” 카일런이 다정했던 시절, 하지만 이젠 의미 없는 일이었다.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반드시 전쟁을 막을 거야.’ 그리고……. ‘내 남편, 체인트가 살아 있어.’
“기분이 어때?” 첫날밤을 위해 꾸며진 방에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오스왈드 로렌스. 이 나라의 유명 인사이자 전쟁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인물. 경멸스러운 눈으로 다프네를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패전국의 포로로 끌려와서 결국엔 맨 꼭대기의 자리에 앉은 여자라.” 빈정거리는 음성이 뒤따랐다. 남자는 막 씻고 나온 것인지 머리는 젖어 있었고 가운만 두른 채였다. 하지만 결혼식 첫날밤에 느껴질 설렘 따위는 없었다. “오늘은 내게 가장 치욕스러운 날이야.” 그리고 명백한 증오심. “……가장 지워 버리고 싶은 날이고.” 차분했던 목소리가 마치 단어를 짓씹기라도 하듯 한 음절씩 끊어졌다. 경멸이 짙게 깔린 밤의 시작이었다.
“카일리. 너는 이 나라의 유일한 공주야. 네 오라비들이 이룩한 영광을 한낱 노예 출신 기사 때문에 떨어뜨릴 작정은 아니겠지? 응?”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그 성미도 사랑스럽기로 유명한 막내 공주님, 카일리 히아신. 그녀는 자신의 호위 기사 제나이른을 찾다가 어머니를 마주한다. “오늘 오후에 마셸 왕국의 유진 왕자가 올 거야.” “어머니! 전 아직 결혼할 준비가…….” “당장 결혼을 하라는 뜻이 아니란다. 몇 년 뒤에 하게 되더라도, 미리 얼굴을 보며 친분을 쌓아 두는 것이 좋지 않겠니?” 말을 마친 황후는 냉정하게 온실을 나섰다. 카일리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멀어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오늘 오후에 마셸 왕국의 왕자가 온대.” “…….” “내 약혼자가 될 사람이래.”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카일리가 고개를 확 들어 그를 째려보았다. “축하한다고? 진심이야?” “…….” “너, 너는…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도 괜찮아?” “……그럼요.” 제가 괜찮지 않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당신은 내가 죽는 날까지 차가웠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버려진 황녀였고, 당신은 원하지 않았던 결혼이었으니. 그리고 우습게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마음은 절대 비밀로 했지만 말이다. 죽음은 한순간에 다가왔다. 지난했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디아나, 안 돼!” 그런데 참 이상하다. ……생각해 보면 당신은 내가 죽는 날, 나를 애절하게 불러 주었고,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나 대신 그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 “아가씨!”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영애의 몸에 빙의되어 있었다. 그것도 클로드와의 결혼을 꿈꾸는, 가난한 하급 귀족 영애의 몸으로. 내가 죽은 이후 3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하룻밤 정도는 어울려 줄 수 있습니다. 혹 이런 걸 원하십니까?” 클로드를 마주쳤다. 완전히 변한 그는, 매일을 술에 취해 엉망으로 살고 있었다. 몸이 바뀌었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의 미움을 받는 일은 이젠 익숙했다. 그래서, 이 몸에서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또다시 날 잃어버린 그가 미쳐 버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 본 작품은 15세이용가로 재편집한 작품입니다.“서원 씨는 사귀기 전에 자는 거 나쁘게 생각하세요?”“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뭔지 물어봐도 돼요?”정해수의 첫인상은 일단 최악이었다.딱 봐도 여자 많이 만나 본 것 같고, 딱 봐도 남녀 사이 잠자리가 최대 관심사인 것 같은 남자.자신과는 정반대 성향의 사람이라며, 서원은 이미 그를 처음 본 소개팅 자리에서 선을 그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쪽과 별로 깊은 인연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요.”“신기하네요? 여자들은 보통 나랑 한마디라도 더 해 보려고 하던데.”안 그래도 비호감인데 뻔뻔하기까지. 그 오만에 질린 채로 서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무리 봐도 자신과는 상극인 남자였다. 소개팅 이후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바로 다음 날에 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그러지 말고 나랑 한 번 더 만나볼래요? 어쩌면 우리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요.”“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셨어요?”사랑이 두려운 여자 서원,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 해수를 만나다.두렵고 떨리기 마련인 첫 경험, 그 처음을 <한 입, 베어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