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륙 전쟁에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이벨라 캠벨. 기억을 잃고 조용한 마을에서 은둔하던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연을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내. 두 사람은 일상을 공유하며 가까워지고, 이벨라는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하나둘 되찾아간다. “벨라.” 떠오른 기억 속의 목소리가 남자의 음성과 너무 같아서. “저는 기억을 잃었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서 불행합니까?” “아니요.” “그럼 된 거죠. 기억 나면 기억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진 대로, 지금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차가운 남자의 위로가 매력적이었다. 속내를 알 수 없어 더 신비로운 남자에게 천천히 빠져들었다. *** “혹시 날 좋아했습니까?” “쓰레기.” “쓰레기를 좋아하면 불행해져요.” 그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고도 남자는 거리낌없이 뻔뻔했다. 그날을 끝으로 그와 엮일 일은 더 없을 줄 알았는데. “안녕 벨라.” 아름다운 쓰레기가 곁에서 여전히 그녀를 보며 웃는다. 허락하지 않은 이름을 멋대로 부르며.
한때는 명문 귀족가의 딸이었으나 이제는 지인 집에 얹혀살며 하녀처럼 살아가는 에바 메이시스. 삶의 밑바닥을 지나고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아름답고 강하며 눈부신 남자, 그녀의 전 약혼자였던 황태자 에드워드를. “왜 울어요, 응?” 에드워드가 에바의 아픈 발을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창피해서요. 흑.” 그의 목소리가 다정해서였을까. 내내 묵혀둔 속엣말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흘러나왔다. 물에 빠져 흠뻑 젖어 있는 모습도, 구멍 나 기워 신은 양말도,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처지도 모두 수치스러웠다. “아파서 그런 건데 뭐가 창피합니까. 발도 이렇게 예쁜데.”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창피할 것 없어요. 무슨 이유든,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에바.” 에드워드는 움츠러든 그녀를 달래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잠깐 머물다가 간 그 남자가 마음에 무겁게 담겼음을, 그가 첫사랑이었음을. *** 고단한 시간을 따라가다가 에드워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물리치고 황실의 시녀가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이 자라고 강해졌을 때. 더 이상 그가 생각나지 않게 되었을 때. “전하께서 잠드시기 전 부족함이 없는지 살피고 기도를 올리는 게 침실 시녀의 일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손을 잡으시는 건.”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영애 앞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한 적이 있습니까?“ 따져 묻는 목소리가 전과 달리 까칠했다. 그녀를 담고 번뜩이는 눈동자가 몹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당신이 황궁으로 들어올 줄 알았다면, 그날 그냥 보내지도 않았어.” 지척까지 얼굴을 들이댄 에드워드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경고해왔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마음대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일러스트 By 감람(@cooking_eggs) 타이틀디자인 By 타마(@fhxh0430)
한때는 명문 귀족가의 딸이었으나 이제는 지인 집에 얹혀살며 하녀처럼 살아가는 에바 메이시스. 삶의 밑바닥을 지나고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아름답고 강하며 눈부신 남자, 그녀의 전 약혼자였던 황태자 에드워드를. “왜 울어요, 응?” 에드워드가 에바의 아픈 발을 잡고 걱정스레 물었다. “…창피해서요. 흑.” 그의 목소리가 다정해서였을까. 내내 묵혀둔 속엣말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흘러나왔다. 물에 빠져 흠뻑 젖어 있는 모습도, 구멍 나 기워 신은 양말도,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처지도 모두 수치스러웠다. “아파서 그런 건데 뭐가 창피합니까. 발도 이렇게 예쁜데.”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창피할 것 없어요. 무슨 이유든,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에바.” 에드워드는 움츠러든 그녀를 달래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가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잠깐 머물다가 간 그 남자가 마음에 무겁게 담겼음을, 그가 첫사랑이었음을. *** 고단한 시간을 따라가다가 에드워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물리치고 황실의 시녀가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이 자라고 강해졌을 때. 더 이상 그가 생각나지 않게 되었을 때. “전하께서 잠드시기 전 부족함이 없는지 살피고 기도를 올리는 게 침실 시녀의 일입니다. 그러니 마음대로 손을 잡으시는 건.”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영애 앞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한 적이 있습니까?“ 따져 묻는 목소리가 전과 달리 까칠했다. 그녀를 담고 번뜩이는 눈동자가 몹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당신이 황궁으로 들어올 줄 알았다면, 그날 그냥 보내지도 않았어.” 지척까지 얼굴을 들이댄 에드워드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경고해왔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마음대로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일러스트 By 감람(@cooking_eggs) 타이틀디자인 By 타마(@fhxh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