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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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유혹

“사람 꼴리게 만들어 봐요.” “…네?” 모든 걸 손에 쥔 남자의 태도가 퍽 오만했다. 그럼에도 제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기대를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잘게 떨리는 제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유정은 친절히도 방금 제가 한 말을 되읊어 주었다. “내가 마음 바꿀 정도로, 꼴리게 만들어 보라고.” 굳게 다물려 있던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번졌고, “왜, 못 하겠어?” 그의 물음이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마침내 대답했다. “아뇨. 할 수 있어요.” 제희의 긴장감 가득한 손가락 끝이 그의 목덜미를 서툴게 쓸어내렸다. 유혹의 시작이었다.

불순한 사이

“죄송하게 됐습니다. 주인공 자리를 뺏어서.” 거북하게 성스러웠던 그날의 결혼식을 망친 건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3년 전 미국에서 죽었다던 정인혁이었다. 남자의 말에선 미안함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연은 상관없었다. 원치도 않는 주인공 자리를 뺏는다니,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었으니까. 남자의 등장에 장내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고,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 속, 결혼식에 별 흥미가 없던 세연도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명백히 저 남자, 정인혁이라는 것을. *** “뭐, 윤세연 씨만 원한다면 내 방에서 자고 가도 되고.” 망쳐버린 결혼식 이후. 불청객 정인혁이 세연에게 또다시 접근한 이유야 뻔했다. 세연의 약혼자 정영준을 엿 먹이려는 불순한 의도. 그걸 알기에 거절하려 했건만. “윤세연 씨도 나 이용하라고.” “그런 개자식한테 순순히 시집가고 싶어요?” 그 말에 세연은 마음을 바꿨다. 정영준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누군가의 붉은 흔적, 그게 떠올랐으니까. “좋아요. 단, 정인혁 씨랑 같이 자고 싶어요, 진짜로.” 단순한 복수심으로 꺼냈던 말이었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지. 그게 불순한 관계의 시작일 줄은.

버러지 같은

“버러지 같은 놈.” 설윤의 기억 속 지은호는 그랬다.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연광 가에 기생하는 버러지, 그런 욕을 들으면서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던. 오랜만에 만난 지은호에게 설윤이 한 말 역시 그랬다. “지선우가 예전부터 제일 싫어했던 게 뭔지 알아? 강설윤이 남한테 관심 가지는 거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네 관심 좀 나한테 달라고.” 관심을 어떻게 달라는 건데. 한없이 진지한 지은호의 표정에 비해 답변은 전혀 구체적이지 못했고, 이런 추상적인 답변이라면 설윤이 제일 질색하는 것이었다. “뭐, 지은호를 좋아해 마지않는 척이라도 해줘요?” “아니지. ‘척’은 티가 나기 마련이거든.” “그러면.” “나를 진짜 좋아하도록 해봐.”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설윤이 묻기도 전에 은호가 먼저 뱉은 말은. “그게 정 어렵다면 같이 잠이나 자는 것도 좋고. 몸정도 다 티가 나는 법이니까.” 어처구니없는 말에 설윤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버러지 같은 놈.” “맞아, 나 버러지.” 설윤의 말을 순순히 인정한 은호가 웃었다. 그 뻔뻔한 태도가 거슬렸지만, 조금 더 심한 욕을 해주지 못한 게 한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우산 같았던 지은호. 아마도 영원히 미워할 수 없을 지은호. 그 버러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