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서림
달빛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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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X에서 인연까지

증오의 낮과 유혹의 밤, 그 사이. 하준의 은밀한 속삭임은 서린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는다. “말해 봐, 네 취향. 혹시나 연상이라면… 오빠라 불러도 좋은데, 난.” 성큼, 하준이 숨결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서린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중단했다. 금방이라도 그의 진한 눈빛 속으로 스며들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랑과 우정 모두를 잃게 만든 윤하준인데. 그에게 끌리는 감정을 멈출 수 없다. 위험하고도 애틋한 둘의 관계는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데... *남주/ 윤하준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이 그 사람으로 가득 차는 그의 사랑은 집요하고, 끈질기다. *여주/ 하서린 분명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철벽녀인데, 자꾸만 흔들린다. 그것도 원수에게.

소리가 울림이 될 때

비 오는 날이 참 싫었다. 꼭 쏟아지는 비에 잠겨버릴 것만 같아서. 이 슬픔이, 삶의 모든 우울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눈 그가 말했다. “비 오는 날 만나요. 우리.” “…….” “비 오는 날은 솔이 씨 눈에서도 비가 내린다면서요.” “…….” “그 비를 그치게 해줄 수는 없지만 같이 맞아줄게요. 우리 같이 기다려요, 비가 멎는 순간을. 비는 언젠가 그칠 테니까. 비 맞고 청승 떠는 거,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겠어요?”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오늘 처음 알게 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세찬 비를 맞고 있는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들었다. 혼자 비 맞고 있지 말라고, 함께 맞자고.  비가 그치는 날이 올까. 가족과도 같은 존재이자 삶의 전부였던 성은의 죽음은 솔에게 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상실이었다.  성은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무거운 죄책감으로 인해 솔은 물에 빠진 것처럼 숨쉬기조차 힘든, 공기가 모자라는 듯한 삶을 이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솔의 목소리에 위로받았던 그, 하울림. 울림은 자신이 받은 온기를 그녀에게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따스함을 건네기로 한다. 솔은 무서웠다. 자신은 어둠 속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인데 그가 자꾸 밝은 곳으로 이끄니까.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었던 남자와 행복을 거부한 여자의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남주/ 하울림 건축가. 아버지의 죽음과 여자친구의 배신으로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알코올에 의지한다. 어김없이 술에 찌들어 도심을 무의미하게 헤매던 그때, 한 여자에게서 속삭여지는 음악에 두 눈을 감는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아요. 솔이 씨 음악이 절 살리기도 한 거니까.” *여주/ 은솔 싱어송라이터.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성은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도 낯설고 차갑기만 하다. 성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된 어느 날,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 남자를 마주한다.  “울림 씨 말대로라면, 오늘은 저에게도 해피엔딩이에요.”

가슴속 첫 번째 이름

서은호가 한새봄을 떠난 지 6년째 되던 해. 어떤 장애물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한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심장이 저리고 숨이 가빠오는 순간조차도 새봄의 목표는 오로지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길의 끝에 있었다. 밀물이 몰려오면 바다는 해변의 모든 흔적을 감싸 안는다. 남겨진 발자국은 물결 속에서 희미해지며, 조개껍데기는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소리 없이 품고는 썰물과 함께 빠져나간다. 바다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오직 깨끗한 모래사장만을 남긴다.  그날 새봄은 유독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시간이 훌쩍 지나 어둠이 짙게 깔려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지만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여기의 바다는 느껴본 적도 없는 모친의 따뜻한 품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친이라는 존재에게 벌을 주는 신 같기도 했다. 그런 신이라면…… 어쩌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정말로…… 깊은 곳에서 슬픔을 삼키고 있어요?” 새봄은 먼바다를 향해, 그리고 끝없는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꼭 듣고 싶었던 그 대답이 수평선 너머로부터 들려올 것만 같아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질 메아리를 기대하며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한새봄.” 하도 대답이 들려오길 바라서일까, 정말인지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음성이 귀에 부딪혔다. 파도 소리보다도 더 아프고, 빗소리보다도 더 절절한. 하아,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 새봄은 눈을 감았다 뜨며 뿌연 시야를 닦았다. “새봄아.” 다시 밀려온 울림에 새봄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번에는 절대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의지를 거스르듯 움직였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짙게 드리워진 안개 속에서 6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서은호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