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후 눈을 뜨니 영혼들의 세계, 타나토에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연영은 죽기 전 매일 꿈속에서 만났던 남자를 마주하게 됐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내가 말했죠.” “네?” “아, 기억을 모두 잃은 상태인가. 우리 키스 한 번만 해 볼래요?” 남자는 꿈에서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꺾으며 연영에게 다가왔다. 더운 숨이 입가에 훅 끼쳤다. 연영을 탐색하는 집요한 백색 눈동자에 감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 맞닿자, 전생의 기억은 조금씩 흘러 들어왔다. “기억이 좀 났어요? 만날 때마다 우리 이것보다 더 진하게 작별 인사했잖아요.” 이 남자, 류원은 연영이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전생에 류원 씨 연인이기라도 했나 보죠?” “궁금해요?” 마침내 입술 근처에 있던 손이 멀어졌다. 류원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겠다는 듯 말없이 활짝 웃었다. 연영은 몰래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남자와 나는, 무엇으로 얽힌 것일까.
벨리아의 세상은 하루아침에 처참히 망가졌다. 그것도 그 누구보다 찬란히 빛나야 할 약혼식 날에. 그녀의 부모가 사랑하는 연인의 부모를 죽였다. 그날부터 벨리아를 수식하는 단어는 완전히 바뀌었다. 늑대족 이그프리스의 공주에서 제국의 역적으로. 황자 타트위의 연인에서 부모를 죽인 원수로. 설상가상으로 타트위를 구하기 위해 행했던 각인은 그들을 갉아먹는 사슬이 되어 목을 조였다. 타트위는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벨리아, 넌 나에게 각인하지 말았어야 해.” * * * 황성에 감금된 생활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벽을 부수고 도망쳤다. 그러나 타트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벨리아가 갈 곳은 클레멘티아 숲밖에 없다는 사실을. 막다른 길 앞에서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벨리아는 황성으로 돌아가자며 협박하는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 “왜냐하면 날 아직 사랑하거든. 제 말이 틀렸어요?” “알면서 도망친 이유가 뭐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진정한 지옥 같은 건 아직 펼쳐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