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흩날리는 봄날. 희원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소꿉친구에게 다른 후배와의 데이트를 위해 약속을 취소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그러나 굴욕도 모자라 굴욕을 목격하고 놀리기까지 하는 이가 있었으니. 하필 희원이 존경해 마지않던 유명한 작곡가이자 뮤지컬의 음악 감독인 김준혁이었다. “네?” “못 들었어? 난 두 번 말 하는 거 안 좋아하니 이번엔 잘 들어.” 그리고 모든 굴욕과 치욕을 다 보인 그날, 준혁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제안을 받는다. “널 최고로 멋진 뮤지컬 배우로 만들어 주겠다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몸을 사리는 희원의 말을 준혁이 중간에서 싹둑 잘랐다. “대가는 없어. 솔직히 너한테 바라는 게 없으니깐.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어쩌면 이기적인 내 욕심을 위한 거야.” 대가는 없고 알 수 없는 감정만 가득한 이상한 관계. 과연 이 관계의 끝은 어디일까.
MK의 젊은 후계자 강재욱 전무. 견원지간인 케인이 공항에서 한 여자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좋은 계획이 떠올랐다. ‘저 자식 앞에서 저 여자가 내 애인인 척한다면?’ 뛰어난 실력을 가진 미모의 뮤지컬 배우 하희주. 마녀로 낙인찍힌 그녀에게 재기의 기회가 왔으니, 바로 뮤지컬 ‘카르멘’이었다. ‘카르멘을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복수심에서 시작된 그들의 계약. “이 계약을 핑계로 제게 질척대면 곤란해요.” 대담한 희주의 말에 재욱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토해냈다. 마침내 웃음을 멈춘 재욱은 잡아먹을 듯 희주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참 발칙하네.”
<하자는 거지. 지금껏 우리가 했던 짓.>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갈 인연이라 여겼다. 이안이 다시 나타날 때까진. “오랜만이에요, 모아나. 아니, 이제 은도은 실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나지막하면서도 깊숙이 울리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나긋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도은은 깨달았다. 지금의 조우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제대로 놀고 싶어졌잖아. 당신과 말이야.” “지금 무슨 말을…….” 이안이 쭉 몸을 폈다. 위협하듯 천천히 목을 돌리던 그가 예고도 없이 그녀 위로 상체를 숙였다. 시원한 향과 함께 위험할 정도로 섹시한 남자의 몸이 완벽하게 그녀를 압도했다. 느릿하게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과 제대로 놀고 싶어졌다고.” 진실했지만, 진실하지 않았던 밤. 달콤하게 입맞춤하던 그 입술로 차갑게 속삭인다. “얌전 빼지 말고 즐겨.”
<쉽게 가자고, 우리.> 낯선 곳에서 낯선 이와 말 그대로 미쳤던 밤. 단 하룻밤의 일탈이자 비밀이라고, 은조는 여겼다. 그 남자를 다시 서울에서 만나기 전까진. “하 비서, 어서 인사해야지. 서도진 지사장님이잖아.” 현성의 유일한 후계자, 서도진. 그 섹시하고 오만한 남자가 바로 그였다니. 이어 은조에게 찾아온 인사이동. 기획전략팀, 정확히는 서도진을 보좌하는 비서직이었다. *** 도진이 픽 웃으며 낮게 입을 열었다. “잘 빠져나간단 말야.” “이 역시,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 빈정거림을 오히려 은조는 화사하게 웃어넘겼다. 그 모습에 도진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지만, 곧 은조의 옅은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위험스러울 만큼 도진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이어진 나지막한 속삭임. “그럼… 이것도 한번, 빠져나가 봐.” 도진이 고개를 숙였다. 가냘픈 뒷덜미를 한 손으로 감은 그의 눈빛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아뇨. 전 돌아가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덜 아프고 덜 힘들었을까. 태경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차문혁. 삼류 건설 회사의 천덕꾸러기 차녀 여설아. 시작부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설아는 문혁에게 마음을 키웠다. 비록 집안에서도 무시당하고, 문혁 역시 한없이 차가웠지만. 오만하고 서늘한 모습마저 사랑했다. 누군가 사랑을 구걸하며 살고 싶냐고 물었던가. 맞아. 구걸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으로 설아는 깨달았다. 더는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살 필요가 없음을. 그렇게 문혁과 이혼한 지 2년 후. 플로리스트가 되어 한국으로 들어온 설아는 다시 차문혁과 엮였다. 아니 정확히는 차문혁이 설아에게 덫을 놓았다. 다시 제 옆에 묶어두기 위해. “…싫어요. 다시는 당신과 얽히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