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렇게 흘리고 다녀요?” 과거 장래가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후견인의 학대 속에 고달픈 삶을 살게 된 여자, 윤해인. 치매를 앓는 엄마의 회복만을 바라며 연주하는 그녀의 앞에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난 어때요.” “네?” “저런 남자 만나야 할 정도로 돈이 급하면 나한테 스폰받는 건 어떤가 해서.” 매정하고 날카로운 말로 심장을 차갑게 얼리던 남자. 그리고 해인의 첫 경험을 가져간 남자, 강재겸. “왜 저한테 자꾸 그런 말 하세요?” “그날 밤,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요.” 남자를 볼 때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설렘 같기도 하고, 기대 같기도 한 이 두근거림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래도 고단한 제 인생에 앞으로 무게감을 더해 줄 남자일 줄도 모르고.
“진짜예요. 선배를 좋아했어요. 선배 따라서 도서관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선배가 농구할 때도 멋있었고요. 천문학자가 꿈인 것도 대단해 보였어요. 울고 싶을 때 선배 덕분에 힘이 됐어요.”시준이 눈매를 찡긋하더니 눈썹 앞머리를 긁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사귀기라도 했습니까?”그의 말에 은재는 놀라서 대답했다.“네? 제가…… 선배를 좋아한 건데요.”서로의 마음도 아니고, 굳이 짝사랑한 여자를 선처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옆에서 기다리던 남자를 부르려고 손을 올렸다. 은재가 그것을 눈치채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네, 맞아요! 선배, 우리 서로 좋아해서 사귀었어요. 그런데 선배가 유학 가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거예요. 보고 싶었어요.”그는 울먹이는 여자를 내려다봤다. 하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빚어 만든 도자기 인형 같았다. 큰 눈 안을 꽉 채운 맑은 갈색 눈동자가 찰랑이는 눈물 속에서 반짝였다. 우리가 사귀었다고. 아마도 살고 싶어서 지어낸 말이겠지. 거짓말을 한 주제에 눈빛은 또 왜 저리 애절한지. 그러나 그녀가 시준을 좋아했다는 말은 진실인 듯했다. 문득 사고 전의 삶에서 이 여자와 어떤 경험을 했을지 궁금해졌다.“우리가 서로 좋아했다고요? 키스도 했나요? 고등학생이니 그 정도는 했겠지.”시준이 은재의 뺨에 있던 한쪽 손을 목덜미 깊숙이 밀어 넣었다.“그 말,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