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산소
맑은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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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순이네 억금식당

새벽 별은 화려하게 점멸하며, 산책길을 밝혀 주었다. 저 지혜의 빛이 등불이 되어 막힌 문장의 물꼬를 터 주기를 은수는 간절히 바랐다. 자신이 한동안 제대로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자, 은수는 눈앞이 조금 어지럽게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무언가 품에 잔뜩 안은 채, 빠른 속도로 걸어오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은수는 기운이 없어서 부딪치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남자는 너무 놀라 안고 있던 물건들을 전부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의 어깨를 잡아챘다.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주는 통에, 은수는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당황한 남자가 무언가 다급하게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꼬르륵. “아, 죄송… 너무, 너무 …배가 고파요….” 얼어붙어 있던 남자는 은수의 말을 듣고 멍하니 서 있다가, 대뜸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은수는 힘이 없어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어… 어어… 바보 같은 소리만 냈다. 남자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커다란 트럭의 조수석에 은수를 메다꽂았다. 잠깐. 은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차 시동을 걸었다. 나, 모르는 남자에게 납치를 당한 건가? “사… 살려 주… 살려 주세….” 꼬르륵. 납치범에게 흐느껴 울면서 말하는데 배에서도 정신없이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남자는 그런 은수를 보고 아무 말 없이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은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는 깨끗하고 단정한 간판이 놓여 있었다. [억금식당 본점] “뭐 하고 있어, 이 냄새나는 아가씨야!”  그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 차려 줄 테니까 빨리 들어와!”

벼 이삭, 금빛으로 익어 가는 소리에

타인과 살갗이 닿으면 상대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여성, 해린은 투병 중 귀농하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인 허름한 농가주택을 처분하기 위해, 단몽리로 향한다. 회색빛 콘크리트가 빚어낸 도심 풍경, 삭막한 일상에 익숙한 그녀는 행여라도 이동 중 타인과 닿을까 두려워 흰 장갑을 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평생 올 일 없을 꽉 막힌 시골, 단몽리. 낯선 초록에 닿은 그녀가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고여 있는 설움이나 비참한 마지막이 아닌 삶에 대한 간절함, 내일을 향한 기대의 싹이었다.가슴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해린을 살갑게 반겼다. 흡사 금빛 윤슬이 가득한 바다를 연상케 하는, 황금색의 벼 이삭들이 바람결에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며, 해린은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작은 시골집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홀로 귀촌한 그녀 앞에 나타난 수려한 외모의 남성, 해인. 자신을 단몽리의 이장이라 소개한 그는 묵묵히 해린의 적응을 돕게 되는데, 왜일까, 해린은 눈을 서로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로부터 들려오는 마음의 형태, 감정의 색을 읽어 보면 온통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의 애틋한 내용뿐. 그녀는 어렴풋이 느낀다. 해인과 함께하는 자신의 일상이, 그렇게 스스로의 영혼의 색이 점차 푸르게 물들어 곱게 익어 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