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은효공주를 모시고 와.”한려왕의 그림자, 오로지 한려의 왕을 위해 살아온 남자, 여주민.한려왕과 같은 어머니를 두었지만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황제국의 적통공주, 예여령.“어찌 제가 감히 마마를 똑바로 마주 서서 알현하겠나이까.”“그만두십시오. 원래대로 돌아와 주세요. 부탁입니다, 아니, 명입니다.”“그럼…….”갑자기 주민이 방금 전까지 굽실거리던 사람답지 않게 똑바로 섰다. 그러더니 여령의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더니 여령의 코앞에 서서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기에, 여령은 이 사람이 방금까지 감히 저와 마주 설 수 없다고 극구 머리를 조아리던 이가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혹시 또 자신을 놀린 건가 싶어 고개를 살짝 꺾는데, 주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그럼…….”잠깐, 목소리가 왜 이리 가까운 걸까. 새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민의 얼굴이 너무나 가깝다. 말을 뱉은 입술이, 호흡하는 코가, 그리고 유난히 그윽한 눈이, 저 깊은 눈이, 지나치게 가깝다. “공주로 대하지 않아도 됩니까?”
귀신 들린 아이. 소서아. "네가 죽였어, 네가. 귀신 들린 년이……." 그녀에게 닿은 사람은 피가 터져 죽었다. 저주받은 힘이었다. 어둠 속에 버려진 비참한 삶이었다. 어느 봄날,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북주태가의 가주님이시다.” '노, 놓아……!' 소서아는 팔목을 힘껏 비틀었다. 허나, 뱀처럼 똬리를 튼 사내의 손아귀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하릴없이 경직되었다.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발작하듯이 뛰었다. 머릿속에 해일과 같은 파도만 쳤다. “……!” 그러다 일순 잠잠해졌다. 거짓말처럼. “쓸 만하겠구나.” 분명…… 제 사악한 기운을 누르고 있는 게 분명한, 저, 사내. "나를 따라가기 싫다면 말하거라. 네가 다른 이의 수중에 들기 전에 죽이고 가도록." 그의 도구로, 그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그건 분명 구원이었다. 그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