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면 나와 결혼하지.” 청혼을 빙자한 명령에, 빚쟁이는 거절조차 할 수 없었다. 제국 최고의 투자자이자 사업가, 원석을 발굴해서 다이아몬드로 깎아 내는 냉혹한 남자. 아스테어 세이프리드 공작이 택한 여자는 볼품없는 몰락 귀족의 여식이었다. 가난한 하급 귀족 여식을 오랜 기간 후원하고, 졸업과 동시에 청혼했다는 소설 같은 연애담. 실상은 남자가 써낸 거짓 연극이었다. “어차피 내가 널 샀는데,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남자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결혼했지만, 남은 거라곤 상처투성이 결혼 생활뿐. 다프네는 결심했다. 한평생 짝사랑한 아스테어를 완전히 떠나겠다고. “걱정 마세요. 어차피 당신은 곧 저와 이혼할 거니까요.” 그렇게 모든 빚을 갚고 계약을 종료하려고 했다. “딱딱하게 공작님 말고, 여보라 부르랬지.” “대체 언제까지…….” “평생. 우리 둘 다 죽을 때까지. 결혼 계약이란 그런 게 아니겠나?” 그의 속박이 더욱 강해졌다.
공화국의 전쟁 영웅, 비운의 전 황태자. 오랜 전쟁 끝 냉전 시대에서 많은 칭호로 불리는 남자. 소베크의 다미어스 엘데아르드 대공. 그리고 가명 ‘리체 솔리온’을 두르고 대공의 주치의가 된 아틀란티아 스파이.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의심하며 다가가고, 그녀는 의심을 무너트리려 그를 매혹한다. 슬슬 끝내야 한다. 사랑을 닮은 이 사냥 놀이는 먼저 진심이 되는 자가 패배할지니. * * * “그 남자 말고, 나한테 갈아타는 건 어때.”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선생의 대답은?” 그의 엄지가 입술을 누르자, 천천히 틈이 벌어지며 숨결이 새어 나왔다. 뜨겁게 엉킨 공기가 혀끝을 맴돌았다. “제 대답은…….” 리체는 그의 단정한 옷깃을 움켜쥐었다. 남자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녀에게 끌려가 주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