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겠어?”마음에도 없는 걸 물었다.조금은 긴장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에, 그래도 한 번은 묻는 게 예의지 싶어서.“후회할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돌아온 건 퍽 당돌한, 그리고 꽤 기꺼운 대답이었다.그렇게 하룻밤 인연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일자리가 필요해요.”4년 만에 걸려온 연하의 전화에 재신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그동안 연락 한 번을 않다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라니.그래서, 그토록 그리던 연하를 제 곁, 가장 가까운 자리에 비서로 앉혔다.어느새 다시 같이 자는 사이가 되고, 진한그룹의 승계권을 거부하기 위해 제 약점으로 만들었다.언젠가는 끝나고 서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설 사이.그렇기에 절대 그 사이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전무님. 저 좋아하세요?”“응. 그런 것 같은데.”넘어선 안 될 그 선을 결국 넘어버렸다.아니,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졌다.처음부터 둘 사이에 그런 것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도서입니다]>
20년. 길어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가끔씩 떠올리던 누군가도 어느새 기억 속에 묻히고도 남을 시간이었고.“윤성연 씨, 맞으시죠? 민세하입니다.”‘애네. 여전히 어리고.’웃기게도 네 살 때의 그 이목구비가 그대로 그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차 있었다.아마 제 이름을 대지 않았어도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봤지 싶을 정도였다.“민세하 씨, 저하고 결혼할 생각 있습니까?”선 자리를 핑계로 그냥 잠깐 만나만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세하의 하얗고 말간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 망설여졌고, 결혼 생각이 있다는 얘기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해요, 결혼.”주저없는 대답이 나왔다.분위기도 목소리도 표정도, 그 어떤 것도 프러포즈 같지 않은 물음에.자리에 앉은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결정된, 계약보다는 합의에 가까운 결혼.‘그러니 사랑 같은 감정은 생겨나지 않겠지.’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오만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인지 깨닫지 못한 채.<[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도서입니다]>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버린 첫사랑 생각에,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들어간 미술관이었다.윤조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으며, 가만가만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짚어보았다.기억을 더듬던 윤조의 시선 끝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입고 있는 코트며 셔츠며 온통 까맣고 회색인, 무채색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사람이었다.‘잠깐만,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어떻게?’전시실에 걸려있는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들을 뒤로 하고,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니, 바라봤다기보다는 그저 고개를 돌린 거라고 해야 정확할 터였다. 처음부터는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제 시선이 느껴져서였을 테니까.못 볼 사람을 본 것 같은 눈빛에 무감하면서도 익숙하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한 느낌.‘아냐, 분명 아닐 텐데.’눈앞이, 머리가 핑 돌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어, 괜찮아요?”그제야 아무 감정 없던 덤덤한 눈에 다소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가까이 다가와서도 잠시 머뭇거리는 남자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날 보고 주저앉기까지 한 사람은 처음인데. 일어날 수 있겠어요?”한없이 쿵쾅대는 심장 위로 그가 내민 손이 보였다. 역시나 머뭇대다가 조심스럽게 잡은 남자의 손은 서늘하다 못해 차가웠다.그 겨울날 맞잡았던 뜨겁고 부드러운 손의 느낌은 여전히 기억 속에 갇힌 채였다.<[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