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산
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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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버릭(Maverick)

로마의 신상 조각을 연상케 하는 단단한 근육질의 몸. 고개를 꺾어야 겨우 얼굴이 보이는 장신의 남자. 젖은 머리카락 사이, 벼린 칼날 같은 콧대 옆으로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이 조용히 그녀에게 못 박혔다. 성가시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무심한 시선 앞에 진예소는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양 돌처럼 굳어 버렸다. “무, 무, 무슈 르부아. 아니, 왓 더 헬…….” “뭐. 남자 몸 처음 봅니까?” “아니, 왜 대낮에… 이렇게, 다 벗고…….” 인류의 종말을 목격한 듯한 표정인 예소와 달리, 남자의 얼굴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샤워 중인 사람 집에 뛰어들면서 경보기까지 울린 사람이 할 말인가? 강도가 들었는지, 불이 났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비상이라고 사이렌이 울려 대는데 격식 차리고 뛰쳐나오나.” “1시 30분 미팅이잖아요. 고작 10여 분 일찍 온 것뿐인데…….” “그쪽이 방해 안 했으면 지금쯤 샤워 마치고, 옷 갈아입고, 커피 내리며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경보기 해제도 눈치껏 일정 안에 넣어 뒀어야 했나?” 괴팍 예민 보스인 줄만 알았더니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강박 변태 또라이였을 줄이야. 완전히 잘못 걸렸다. * * * 천상천하 유아독존, 테니스계의 매버릭(Maverick: 이단아), 이호 르부아. 이 음침하고 오만한 남자가 아련한 추억 속 동경하던 풋사랑과 동일 인물이었다니. 현실에서의 재회도 충분히 황당한데, 온통 비밀스럽기만 한 그의 계략에 휘말려 버렸다. 잠깐, 그런데 속절없이 빠져드는 이 찐사랑 역시 계획의 일부 맞냐고!

더 고스트(The Ghost)

※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 회사, 단체 및 사건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로, 실제와는 무관합니다. ※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또한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이 없는 작가의 창작입니다. ※ 본 작품은 시대적 분위기와 표현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일부 외래어를 관용적인 표기로 사용하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외교부 공공외교총괄과입니다. KTBC 소속 고보희 특파원 유족분 되십니까?” “네에? 유족……이요?” “아, 죄송합니다. 공문이 좀 애매하게 와서.” 대학생 한나율은 어느 날 갑자기 외무부 관계자로부터 미국 현지 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엄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 뜬금없는 건 둘째 치고 실종인지 사망인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상황에 나율은 타국의 공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엄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최근 엄마로부터 날아온 이메일이 그들의 사망 추정 일시보다 훨씬 나중이었기에 나율은 확신했다. 엄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THE GHOST. 인사도 안부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메일 본문에 떡하니 쓰인 내용은 저 단어가 전부였다. 이래서야 이게 암호인지 단서인지 장난인지 미끼인지 알쏭달쏭하기만 한데. 수소문 끝에 가장 빠른 날짜로 탑승한 비행기는 의문의 추락 위기를 맞고, “젠장, 왼쪽 엔진인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나율은 생김새부터 하는 행동까지 범상치 않은 남자를 만난다. “지금 이 상태로 앵커리지 공항까진 힘들 거야. 그렇다면 어딘가에 불시착해야 된다는 얘긴데…….” 기장이 멍청이가 아니면 좋겠군. “만약에 기장이 멍청이면요?!” “그땐 다 같이 손잡고 우리를 만든 분이나 만나러 가야겠지.” 비행기가 불시착하려는 위기에서 농담이나 지껄이는 수상한 남자라니……. “아저씨 도대체 뭐 하는 분이신데…….” “아저씨?” 미간을 구기는 남자의 얼굴에 나율은 어이가 없어 신물이 올라왔다. 아니 지금 우리 다 죽는다면서요……? 이 와중에 아저씨면 어떻고 오빠면 어떤데요……. “내 이름은 차무강이야. 그리고 그냥 죽으면 억울할까 봐 까놓고 얘기하자면……. 네가 찾는 고스트가 바로 나야.” 그는 실종된 엄마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 “패딩 벗어.” “네? 미쳤어요?” 이렇게 추운데 옷을 벗으라니! 더 껴입을 옷이 없는 게 한스러운 마당에. “그렇게 두꺼운 옷을 입은 채로는 이 안에 두 사람 다 못 들어가.” 뭐? 저 좁은 침낭 안에 같이 들어가자고? 지금 제정신인가. “시, 싫어요!” 생면부지의 남자랑 한 이불도 아니고 한 슬리핑 백에 들어가 밤을 보내다니. 어떻게 그런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 남자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플래시라이트의 희미한 불빛 아래 공기 중에 퍼지는 입김이 보였다. “보다시피 지금 가장 따뜻한 발열체는 너랑 나. 가진 건 체온뿐이야. 그러니 뭉쳐 있는 게 아무래도 살아남을 확률이 크겠지.” “그치만……!”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들어오고,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