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장례식장 저 구석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젖어, 듣는 이의 마음마저 먹먹해지게 만드는 소리였다. 승조는 이끌리듯,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뚜벅뚜벅. 자신의 구둣발 소리에 놀란 건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여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에선 피가 터져 있었다. “누구……?” 미처 수습하지 못한 눈물이 여자의 눈에서 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승조의 마음을 아리게 울렸다. “조문 왔습니다.” 태어나 처음, 오지랖이란 걸 부려보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녀의 울음이, 그쳐질 것 같았다.
“넌 내 거야.” 처음 본 순간, 인형을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한 남자 고유준. 국내 3대 금융그룹 한신투자전략 본부장 유준의 집착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렬해졌다. 인형의 대학원 졸업식 날. 넘어지려는 인형을 대학원 동기가 부축해주던 순간. “그 손 놓지?” 누군가, 낮고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인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벅저벅, 둔탁한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가로등 아래 남자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누, 누굽니까?” 어둠을 뚫고 나오는 남자의 아름다움에 동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인형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를 본 남자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여기 있는 여자, 이인형…… 주인.” 인형을 향한 남자의 눈빛엔 진득한 소유욕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사람이건 소재건, 쓰레기 재활용에 한결같은 네 취향은 정말이지.” 강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균형을 잃고 올라간 입꼬리가 비아냥거리는 것이 역력했다. “정말이지 너무 구려서, 어이가 없을 정도야.” “구리건 말건 그게 누구건 상관없어요.” 또 그 소리. 소유의 상관 없다는 말이 강현의 날카롭던 신경줄을 툭 끊어 버렸다. “그 말은 나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네?” “뭐라고요? 무슨…….” 소유의 눈이 놀라서 크게 벌어졌다. 떨리는 속눈썹에 혀를 가져다 대고 싶었다. 미친놈. 강현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나랑 하자고, 결혼.” 쓰레기 같은 놈과 결혼하게 두느니 차라리 제 옆에 두고 말려 죽이고 싶다고. 단지 그뿐이라고. 강현은 제 마음을 단정 지어버렸다. “그따위, 쓰레기와 결혼을 할 거면. 차라리 나랑 해.” 5년 전,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소유에게 강현은 충동적으로 청혼했다.
은밀한 찰나, 빠져들었다. 예쁘게만 생긴 인형이라고 생각한 해원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든 순간. 강우는 묘한 끌림에 그녀를 눈에 담았다. 헤어나올 수 없이 빠지게 될 줄도 모르고. *** “장학생.” 나직한 부름에 해원이 뒤돌아 강우를 보았다. “이젠 장학생 아니에요.” 반항적인 목소리가 달콤하게만 들렸다. 빠져도 단단히 빠졌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 변호사님?” “아뇨. 전무님 회사에 입사했어요. 직원이니 편하게 부르세요.” 편하게 부르라면서도 표정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마저도 예뻐 보이니, 속도 없지. “호칭이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건…….” 말꼬리를 느른하게 늘이며 거리를 좁히자, 해원이 숨을 들이켰다. 그 숨마저 삼키고 싶었다. “네가 내 아래로 들어왔다는 거지.” 한 번 제 영역에 발을 들인 건, 놓쳐본 적 없다. 이해원, 너라고 예외일까.
“반가우면 격하게 환영해줘.” 유학을 마치고 3년 만에 귀국한 지한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지수와 재회하며 다짐했다. 여전히 자신을 동생 친구로만 여기는 네가 날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지 않겠노라고.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지수에게 성큼 다가선 지한은, 고개를 기울여 지수와 거리를 좁혔다. 난 빨간 모자를 속이는 늑대처럼 속내를 숨기고 네게 다가갈 거야. 뜨거운 숨결이 볼을 스친 순간. 쿵쿵, 누구의 심장 박동인지 모를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맞물리는 입술 사이로 숨을 불어넣으며, 지한은 생각했다. 하루하루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들어 결국 너도 날 원하고 욕망하게 되겠지. 무심하게, 네가 홀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친구인 지욱을 핑계로 얼굴을 보고, 재무팀 신입으로 입사까지 불사하며 지수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가던 어느 날. 지수가 말했다. “돌려줘…… 내 키스.” 내가 홀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홀린 건, 나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