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 나소은 씨에게 좋은 점이 있어요?”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 결혼으로 나에게 좋은 점이 과연 뭘까. 아빠의 말씀처럼 엄마에게서의 자유? 완전한 자유가 아닌 반쪽짜리 자유일 게 뻔하다. 사랑도 없이 하는 결혼의 실패 사례는 이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고 자랐기에 기대감은 없다.“약간의 자유.”“…그것뿐인데 결혼하겠다고요?”“안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하게 되겠죠. 엄마는 아빠 말씀을 어기지 못하고 난 엄마 말씀을 어기지 못하니까.”소은의 체념한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놓고 남은 인생까지 저당 잡혀 살겠다는 여자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순간 주호의 눈이 반짝였다.“소은 씨, 나랑 결혼하죠.”“…미쳤어요?”“뭐가 다른가요?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도 맞선 봐서 하는 결혼인데 아는 사람하고 하는 결혼이 더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난. 내 말이 맞지 않아요?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 줄 알고 덥석 만난대. 어른들 앞에서 하는 행동만 믿으면 안 돼요. 어른들 눈엔 내 딸을 시집보내도 괜찮은 녀석이군. 일지 몰라도 아내에겐 또 다른 가면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어이가 없어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소은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곁에 머물더니 이젠 결혼하자고 겁을 준다. 알면 알수록 이상하다, 이 남자.“결혼하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아! 옵션이 있어요.”“옵션이요?”“나 은주호가 따라가는데 어때요? 확 땡기죠? 결혼은 본품 나는 견본품.”
비스듬히 숙인 얼굴이 다시 눈앞에 가까워지자 놀란 작은 손이 그의 입술을 막았다.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닌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좀 밖에선 얌전하면 안 돼?”“얌전해지면 내일 혼인 신고하러 갈 거야?”“어? 갑자기?”태평하게 묻는 말에 이태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자세를 바로잡으며 내는 목소리가 제법 컸다.“갑자기? 갑자기라는 말이 나와? 혼인 신고 이야기 꺼내고 벌써 3주가 넘게 지났는데? 원래대로면 이미 법적으로 도장 찍고 인주까지 다 마른 상태여야 한다고.”분기탱천한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지윤의 미소도 얼굴 가득 번져갔다.“가자.”“어딜.”심통 난 목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는 지윤이다.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멈춰 선 몸이 뒤로 돌아섰다.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집에 가자.”“술 마시자.”“갑자기?”“그놈의 갑자기! …내가 진짜 혼인 신고서 가져다가 너 잘 때 몰래 지장 찍어 버릴 수도 있어. 조심해. 이건 진심이야, 모지윤.”“집에 가서 빨리 자야 내일 아침이 오지.”그녀가 뱉은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그는 여전히 심란한 표정으로 다가와 마주 섰다.“아침이 와야 지장 찍으러 갈 수 있잖아.”“ …어디 찍을 건데.”“혼인 신고서. 싫어? 싫으면 말고.”휙 돌아서려던 어깨가 그대로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사르르 녹아버릴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에 지윤은 입술을 모아 쭉 내밀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쪽쪽거리며 입을 맞춘 그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긴 다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면서도 낮게 속삭이는 말로 매를 버는 이태다.“나 지금 너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은데 한 번만 하고 자자.”(개정판)
“감당할 수 있겠어요? 같이 나가 줄까요?”하이에나들처럼 팀장실의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이 걱정이긴 했지만, 우연은 괜찮다며 문고리를 잡았다.“잠깐만요.”걸음이 멈추고 문고리를 반쯤 내린 손마저 멈춰 버렸다. 닿았다. 뭐가? 입술이. 어디에……?“흐음. 이 정도면 확실한가?”분명 온기가 전해졌다. 귓불과 와이셔츠 깃 사이 어딘가에.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쿵쿵쿵 뛰는 심장박동이 분명 노을에게도 고스란히 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좀 번지는 게 좋으려나? 어떻게 생각해요?”“그, 그렇게 생각합니다.”“으응?”“네?”아주 잠깐이지만 마주친 시선을 휙 피하는 우연을 본 노을의 눈매가 가늘게 변한다. 그리고 목덜미와 깃 사이 어설프게 찍힌 립스틱 자국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짓이겼다. 꾹 눌러 번지게 하고서야 마음에 든 모양인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노을이다.“이제 나가봐도 될 것 같아요.”“……이대로?”“응, 그대로.”“왜, 이건 조금.”“이래야 확실하죠. 아니면 입술에 해줄까요?”
4년 동안 그 사람만을 바라보며 만나왔지만,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홀연히 사라졌다.그리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갑작스레 앞에 나타났다.모두들 말했다. 이여주는 안하원이 부르면 달려오는 강아지라고. 그만큼 여주는 하원에게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굴었지만 하원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누가 보아도 한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안하원이 너만 볼 것 같아? 쟤 소문 몰라? 쟤한테 넌 그냥 액세서리야. 옆에 데리고 다니면 부끄럽지 않은, 그냥 딱 거기까지의 존재라고.’옆에서 지켜보는 친구의 말도 여주는 흘려들었다. 오로지 하원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하원의 집에 반찬을 갖다 놓으려고 하는데 도어락이 열리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지만 받을 수 없다는 목소리만 나왔다.그렇게 하원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4년의 시간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그리고 8년이 지난 어느 날, 하원이 앞에 나타났다.“기회를 줘.”“뭐?”“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안하원.”“…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아. 그 모든 걸 털고도 내가 보기 싫으면 그땐 네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그가 떠나고 나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마음이 쓰렸는지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혀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 끈질긴 남자가 자꾸만 주변의 시선에서 걸리적거렸다.“하루만, 하루만 내 이야기 들어줘.”“하원아.”“제발… 딱, 하루만.”하루만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이 남자.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하루면 그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다 들려줄 수 있는 걸까.*본 작품은 15세이용가로 개정되었습니다.
‘다음 생엔 아프지 않고 늘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을 그런 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 곁에 전하가 계셨으면 좋겠습니다.’셀 수 없이 많은 날이 지났어도 너 하나만은 지워본 적이 없었다.“안녕하세요. 차오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사님.”여전히 아름다운 너에게 눈을 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렇게 쳐다보시면 백이면 백 여자들은 오해합니다, 이사님.”“오해 아닐 텐데”“네?”“오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차오름 씨.”똑같은 실수로 너를 두 번 잃진 않을 거다.너의 소원처럼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을 그 날들을 함께하자, 오름아.[본 작품은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작품입니다.]
고개 숙인 하루의 숨이 얼굴 위로 뜨겁게 쏟아져 내렸다. “선을 긋겠다는 건지 단순한 걱정인지 말이야.” 전자라면 다가가는 방법을 바꿔야 하고 후자라면 조금 더 속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겠다.길진 않아도 숱 많은 속눈썹은 그의 눈매를 진하게 만들었다. 감히 피할 수 없게 그윽한 눈길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자 심장박동이 점점 더 빨라졌다. 두근두근.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응? 나봄아. 말해봐.” 이렇게 가까이에서 무슨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겨우 시선을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로 인해 다시 부딪히길 여러 번. “꼬리 쳐줄까?”“……뭘 쳐?”“살랑살랑 흔들리다가 훅 넘어올 수 있게 꼬리 쳐줄게. 안쓰러운 남자 불쌍히 생각해서 넘어와 주면 좋겠는데.”[본 작품은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작품입니다.]
‘준비한 거 없으면 예쁘게 커서 시집이나 오든지.’“예쁘게 큰 거 같으니까 이제 시집와야지.”“……재밌어요?”“아니, 엄청나게 재밌는데.”이 인간이……! 힘껏 날린 주먹이 그의 어깨를 툭 치고 떨어진다. 제자리로 돌아간 그는 언제 가까웠냐는 듯 다시 우아한 자태로 돌아갔다. 긴 다리를 꼬고 찻잔을 쥔 재이의 손은 참 고왔다. 툭, 한 번씩 닿을 때마다 느낀 그의 손은 부드럽고 뜨거웠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부터 하지 말고 며칠 잘 생각해봐.”다정한 듯 제 의견을 존중해주는 듯하지만.“물론, 결론은 결혼 하나밖에 없겠지만.”본인 의견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꼭 이다경과 결혼을 하고 싶거든.”(15세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