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남자가 말했다. “처음 보는 순간 아, 이 여자랑 결혼이라는 걸 하겠구나, 했어요.”숙취로 누워 엄마 이모 동생을 차례로 부르며 나 물 좀 가져다 달라고 외치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집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고음질의 음악과 낯선 사람들의 말소리, 그리고 후각을 자극하는 향긋한 커피 향…….미모로 소문이 자자한 이모의 카페였다.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일어나 주방을 향해 달렸다. 카페 소파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람이 나라고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카운터로 나갔는데, 단 5분도 지나지 않아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든 남자가 있었다.“여기가 잠이 잘 오나 봐요?”“네?”“꽤 잘 주무시더라고요.”피식,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술 끝이 스윽 올라갔다 내려왔다. 처음 보는 이 남자가 방금 나를 비웃었다. 심지어 남자는 더럽게 섹시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덕분에 즐거웠어요.”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세상은 내가 제일 만만한가 보다. 어제는 6년의 짝사랑을 끝내더니 오늘은 개망신을 아침부터 선물했다. - 그렇게 퇴사, 실연, 흑역사 생성까지 겹친 그날. 최악의 순간.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다.
괴로운 과거를 잊고자 새집으로 이사한 이건우. 넓은 마당에 한적한 분위기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지만 미묘하게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옆집 마당의 텐트.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여자. ‘웬 텐트? 이 쌀쌀한 날씨에 왜 좋은 집 놔두고?’ 다음 날, 담 너머로 그녀의 시선을 느낀 그는 낯선 이웃의 관심이 영 달갑지 않아 냉큼 쏘아붙였다. “왜 남의 집을 훔쳐보고 있습니까?” “구경 좀 하면 안 돼요?” “된다고 하면 다음엔 아주 넘어오겠습니다?” “와, 넘어가도 돼요?” 아니, 뭐 이런 여자가. 왠지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그. 그에게 말을 건 목적이 있었던 그녀. 뻔뻔한 그녀와 엮일수록 건우는 점점 더 그녀에게 휘둘리고 마는데…….
“집에 가는 중이에요. 늦어요?” 하라와 건우는 여전히 한집에서, 그러나 아래 위층을 쓰며 동거 중이었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를 건전하게 유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집밥 먹고 싶어졌어요.” - 뭐 할 건데? “된장찌개랑 가지볶음. 되게 먹고 싶죠?” - 일찍 갈게. 마치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그렇게 그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 어울리는 매일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고로 평화란 늘 깨어지고 마는 법. 화창한 초가을의 어느 날, 한 남자가 하라에게 다가와 스마트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윤이겸이라고 합니다. 그쪽한테 반했어요.” 불쑥. 이 낯선 남자의 등장으로 한동안 조용했던 건우의 비상등에 빨간 불이 들어오게 되는데…….
부푼 기대를 안고 나간 맞선.가자미눈으로 그와 대화한 지 어언 30분.“말했잖아요, 낭만적인 연애가 하고 싶다고.”“……음, 무슨 뜻인지 이해는 했습니다.”“어떻게 이해하셨는데요?”“형식적이고 비운명적인 이 만남을 운명으로 만들자는 거 아닙니까?”딱딱하다, 딱딱해.잘생긴 얼굴에 어쩌면 이리도 건조할까.기대는 빗나갔지만 무언가가 계속 꿈틀거린다.차갑고, 건조하고, 재미없고, 거만한 이 남자를어떻게든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남자로 바꾸고야 말겠다는 오기가.그래서 눈을 빛내며 말했다.“우리, 연애부터 하죠?”낭만 연애를 꿈꾸는 내가,非낭만 연애를 추구하는 서정우 씨에게.맞선 자리에서 던진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요조' 로맨스 장편소설 <낭만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