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별당에 버려져 있던 정승댁 젊은 과부 하연은 자신을 죽이려는 시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자루에 담겨 끌려오고 만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대들보에 목이 매달리겠구나, 체념하는 순간 자신을 데려온 사내가 시어머니가 부리는 일꾼도, 자신을 쫓는 무리도 아닌 생판 낯선 사내임을 알게 되는데…. “어?” “어….” 하연이 굳은 건 사내와 마주쳐서만은 아니었다. 그 사내가 어수룩하고 우락부락한 칠동이가 아니어서였다. 그렇다고 수많은 민정승댁 하인들 중 하나도 아니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반듯한 콧날과 붉은 입술과 달리 조금 사납게 치켜 올라간 기다란 눈매, 넝마처럼 옷을 기워 입고도 총기 있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이 앳된 사내는, 그녀가 아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뉘신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물었다. 그러자 여태 당황한 듯 빤히 보고 있던 그의 눈이 둥글게 접혔다. “모자란다더니, 혼자서도 잘 풀고 나왔네?” …모자라? “이제 보니 말도 별로 안 더듬고.” 어째 이 사내, 하는 말이 좀 이상하다. 보시게, 자넨 대체 나를… 누구로 여기고 있는 것이야? *** “그건 안은 거 아냐.” 무슨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하연은 굳게 입매를 가다듬었다. 둥그레진 무헌의 눈이 날아왔다. “왜 안은 게 아냐?” 크게 숨을 들이켠 하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남녀가 몸을 맞댄다는 건, 이런 거야.”
“우리 둘 놓고 내기 중인 거 알아요?선배가 나를 먹나, 못 먹나.”다짜고짜 들이대는 ‘어린 놈’의 공격에 휘청거린다.MNSJ연구소 전설의 마녀 정연주.“너…… 너, 나한테 먹힐래?”쫙 찢어진 두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천재 또라이 막내 이준성.진실을 덮어 버린 별칭 뒤에서헤집어진 상처를 감추는 연주와제 삶을 송두리째 억눌러 온 과거에서끝없이 도망만 쳐야 했던 준성.5년 전, 그들을 망쳐 버린 ‘사고’는다시 한 번 그들을 시험대에 올리고…….“먹혀 줄게요, 기꺼이.”사랑에 상처 입고 진심에 서툰 두 사람이서로를 보듬어 안는 시간.그와 그녀의 거리, 45cm.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너희 병원 아주 몹쓸 놈이 뺏어갔다던데, 너는 괜찮은 거야?”너도 알고 나도 알고 두메산골 사는 엄마도 아는 천하의 몹쓸 놈, 차주헌.“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네요.”재희는 장담했었는데.“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눈도 마주치지 말라는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아서일까.“못 그럴 건 또 뭔가 싶은데.”못 그럴 사이가 그럴 사이가 되어버렸다.어째서인지 자꾸만 엮이는 이 남자와 웃고, 설레고, 울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멋진 일이네요.”빨간 머리에 주근깨를 품었던 앤 셜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거니까요.”
나라님보다 권세가 크다는 대부호 현사호 대감 댁에 발로 차면 부서질 듯한 낡은 가마를 탄 여인이 당도한다. 사는 게 반쯤은 장난인 대감 댁 도련님 태윤의 눈에는 장난이라고는 통하지 않는 빡빡한 그 여인이 자꾸만 거슬린다. “마님의 친척이십니다.” “친척?” 하지만 아무리 권세가의 한량 도령이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법. “안채의 당고모의 둘째 아들의 사돈의 질녀의 시당숙의 양아들의, 부인?” 남의 부인, 그것도 그의 집에서 빌어먹던, 친척을 가장한 버러지 같은 자의 부인이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탐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는가. -책 속에서- 새가 고 서방의 품을 벗어나 보겠다고 푸드덕거렸다. 날갯짓에 새털이 날리고 먼지가 튀었지만, 두 손으로 새를 붙든 고 서방은 그저 신이 났다. “그 새.” “저를 주시면 안 되겠는지요?” 여인의 말간 두 눈이 빤히 그의 허락을 기다렸다. 이상도 하다. 나는 무엇에 이리 심사가 꼬이는 걸까. 태윤은 반걸음을 틀어 여인을 정면으로 보고 섰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처음으로 눈길이 휘지 않고 맞닿았다. 그러니까, 여각에서 그런 눈으로 날 본 주제에. 옅게 주근깨가 박힌 뺨이 붉었다. 빗물이 비껴가던 입술은 매끄러웠다. ‘조가 버러지의 부인, 윤씨.’ 태윤이 긴 눈매를 살포시 접었다. 이깟 새. 청을 들어주면 그만. 나붓한 입술이 툭 열렸다.
동생의 장난으로 모르는 여자와 부부가 됐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 사진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주태인, 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당신 남편입니다.” 그도 여자도 피차 어이없기는 매한가지. 합의하에 수습하면 될 일이었는데……. 이 여자,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한다. “남편이 필요해요.” “설마, 그 남편이 나인가요?” “협조하셔요. 그러면 이혼해 드릴게요.” 뭐가 이렇게 발칙하고 당당하고 뻔뻔한데, 귀엽지? 협박당한 사람, 궁금해지게. “대신, 난 좀 와야겠네요. 계속. 귀둥리에.” 대도시와 두메산골을 오가며 벌어지는 나름 스펙터클 서스펜스 사기 계약 결혼 이야기! 그런데. “사실 주태인 씨는….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남편이에요.” 이 여자, 더 이상한 소리를 한다. 가짜 남편, 승부욕 생기게.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랑은 싸움 안 하는데.” “연애를 하지.” 로열의 로열이라 불리는 청설 그룹의 탕아, 차제영은 형을 사랑한다는 민이경을 의심하고, 의심하다가 어떤 기로에 서게 된다. -본문 중- 부득부득 여자가 일하는 약국까지 찾아가 놓고는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즐거워한다는 건. 또 찾아가서 만나고 싶어졌다는 건. 피식피식 웃다가도 그 사이사이에 엿같은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건. 족보고 자시고 형제간에도 상도덕 말아먹은 아메리칸 자유연애 막장 드라마 속에 사는 게 아닌 다음에야 결론은 하나인 거지. ……내가 아주 X같은 길로 빠지기 직전에 서 있다는 것. 미치지 않고서야 씨X,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참으로, 못되셨습니다.” 더부살이 열아홉 해, 가슴에 꽃물이 들었다. “너는 계속 그놈을 연모해. 나는 그런 너를 연모할 테니.” 그러나 서툰 사랑은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니더라. 가시가 되어 어여쁜 날들을 찌르기도 하더라. “가면, 오지 마소서!” 기어이 울려야 가실 것이니, 이번에도 울어 드리리다! “함가, 모율.” 너를 울리고 또 울려서 여기에 이르니 나는 그저 네게 눈물들의 주인일 뿐이라. 살가운 남편도, 다정한 군주도 되지 못하는 한심한 눈물들의 왕일 뿐이라.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모합니다. 사모합니다. 사모합니다. 푸릇한 잎은 서툰 마음들을 지나 시퍼런 멍으로 피었다. ‘눈물들의 군(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