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잖아요. 연애 마중 나간다고. 짝사랑 배웅했으니까, 이제 연애해야지.” 지친 몸과 마음으로 찾아들었던 눈의 숲 설림리에서 빛을 발견한 카일 켄트. 6년 만의 재회, 그리고 4년의 기다림. 인내는 바닥났고, 드디어 성큼성큼 제 빛 장연우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10년을 품어왔던 마음의 무게로. “왜 여기 계셨습니까? 뭐 필요하십니까?” 사무적으로 밀어낸 말이 카일의 속삭임에 빨려들었다. “장연우.” “네.” “장연우라고. 내가 필요한 게.” ▶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눈의 숲에서 봄을 만나다
성큼 다가온 이준이 머그잔을 가져가 세탁기 위에 놓았다. 단번에 그에게 손이 잡혔다. 그녀를 세탁기에 밀어붙이면서 이준이 속삭였다. “너무 빠른가요?” 뭘 할 거냐에 따라 다르지. 공원에서 이준이 볼에 남긴 인사가 참 좋았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입맞춤이었다. 거기서 표현이 조금 더 짙어진다면 어떨까.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서린 씨가 싫어할까 봐 겁나요.” 이준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은은한 바닐라 향이 났다. 뉴욕에서 받은 스웨터에 배어 있었던 것과 같은 향이었다. 서린은 이준의 턱에 입을 맞췄다. 이준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저는 입히는 게 취향인가 봐요.” “네?” “뉴욕에서 서린 씨가 제 스웨터를 입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제 옷을 입은 서린 씨 보는 게 좋아요.” 단정한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흩어졌다. “다른 것도 입히고 싶어져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어 세탁기를 짚었다. 너른 가슴이 가까워지고, 다른 손이 올라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왕이 쓰러졌다. 공주가 참수됐다. 전쟁이 끝난 직후, 에킬리움의 궁정을 휩쓴 정치적 소용돌이. 극단의 단역 배우 솔레니아 라델라이온은 반역자로 몰려 기병대 총사령관 블레이든 레하트의 노예로 전락한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의 시절.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운명이 얽히는 두 사람. 살아남기 위해선 함께 해야 한다. 상대가 적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채로. *** “오늘 밤, 너를 나의 신부로 가질 거야.” 전희의 시간은 끝났다. 나는 기다렸고, 너는 무르익었다. 블레이든은 망설임 없이 드레스를 찢어 내렸다. 달빛에 물든 여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너도 너의 것을 취해.” 우리가 운명의 적이라고, 신탁이 말했다. 오늘 밤은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레니. 신이 전쟁을 하사한다면, 싸워 주자. 그리고 서로를 전리품으로 삼자. 그깟 운명 따위, 반역하면 그만이다. *이 작품은 ‘레하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러스트: 팔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