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아픈 밤>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는 한국 소설의 사회적 상상력을 탐구하는 시리즈이다. 문학과 예술의 미적 형식을 타고 넘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흔적을 새롭게 탐사하는 서사적 항해를 꿈꾼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또 때로는 서로를 보듬으며, 난파한 세상 속으로 함께 나아가는 문학적 모험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를 발명하는 낯선 이야기의 조타수가 되기보다는, 우리가 상실한 생의 가치와 존재 방식을 집요하게 되물으며, 동시에 우리 삶에 필요한 따뜻한 자원을 발굴하는 ‘사연의 고고학자’가 되고자 한다. 정인 작가의 『누군가 아픈 밤』은 소설의 바다로 향하는 호밀밭 소설선의 여섯 번째 작품으로, 「화마(火魔)」 외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정인의 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모두 여성들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소설은 대체로 화해와 연대로 끝맺지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여성 인물들에게 우리 현실은 여전히 연대하고 모색해야 할 길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로 보인다.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작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 그리고 개인과 이웃의 갈등과 고통에 대한 통찰과 공감의 결과물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조갑상(소설가)
<만남의 방식> "다음 목적지는 어딥니까?" 상처의 발자취를 쫓는 집요한 시선 중견 소설가 정인의 세 번째 소설집 『만남의 방식』이 출간되었다. 이제 우리가 서로에게 숨겨왔던 것들이 드러날 시간이다. 정인 소설의 뿌리인 우리 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그것이 형성한 고통과 치유의 서사는 이번에도 단단한 결정을 이루어 뼈처럼 보석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붙든다. 몸의 상처와 달리 마음의 상처는 평생 완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결코 나을 수 없다면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유를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행위인가. 아닐 것이다. 고백과 폭로라는 일관된 구조를 통해 새로운 시작에 대한 전망을 조심스레 타진해온 정인 소설의 정통성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오롯하다. 8편의 소설마다 빠짐없이 존재하는 ‘나’들은 다양하게 변주된 학교폭력, 성폭력, 가족갈등 속에서 고백 혹은 폭로를 선택하며 숨겨진 의외성을 보여준다. 고백과 폭로 뒤에 숨겨진 의외성 「유서」의 화자 ‘나’는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는다. 남겨진 것은 의문투성이 유서 한 장뿐이다. 유서의 뜻을 따르는 동안 살아생전 아버지의 놀라운 행적이 속속 밝혀지며 가족의 모습은 바뀐다. 예전에 아들을 잃은 ‘나’는 이제 아버지까지 잃었지만, 아버지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리라 예감하는 모습은 참척(慘慽)의 아픔을 토로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왔던 것일까. 제 18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표제작 「만남의 방식」은 불발된 화합에 밀착한 작품이다. 그동안 전혀 왕래가 없던 재일교포 2세 ‘사촌’이 별안간 한국에 사는 ‘나’를 찾아오겠다며 연락한다. 처음 만나는 사촌과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흐뭇”해하던 화자의 기대와는 달리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게 싫었”다는 사촌은 통역까지 대동해 완벽한 일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촌은 ‘나’의 어머니가 전날 밤부터 차린 정성스런 음식상조차 “너무 복잡”하다는 말로 일축하고, ‘나’의 백부이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전달한 뒤 부리나케 떠난다. 무엇이 이 정겨운 잔치를 싸늘하게 만들었을까. 늦가을처럼 서늘한 「만남의 방식」을 지나면 겨울밤 같은 「밤길」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작품집 중 가장 어두운 색채를 지닌 이 작품은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던 한 대리운전기사의 딸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다.밤 중 차 안이라는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오직 인물의 대화로만 구성된 팽팽한 긴장감이 일품이다.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잊는가? 심리상담 사례들을 취재하며 영감을 얻은 「해바라기의 비명」은 화자 ‘나’가 학교 선생님인 친구 ‘남희’가 지도하는 연극부의 공연에 초대받으며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를 따라간다. 성폭행을 소재로 한 연극의 주인공을 맡은 여학생 ‘연지’의 연기를 보는 ‘나’, 즉 ‘지연’은 연극을 보는 내내 애인과의 깊은 관계를 망설이는 자신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화자인 ‘나’가 관객이 되었다가 다시 무대 위로 오르는 소설 속 인물의 동선은 독자로 하여금 극중극을 보는 듯한 흥미로움을 더한다. 「호수 근처」는 한 걸음만 더 물러서면 물에 빠져버리는 배수(背水)의 위치에 자리한 주인공의 처지가 제일 먼저 들어온다. 다단계 조직에 발을 들여 빚을 떠안은 청년 ‘나’는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충동적으로 옆집 노파를 죽이고 도망치는데,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웃집 아이 ‘순미’가 그의 뒤를 따른다. 갈 곳 없는 둘은 호수 근처에서 낚시를 하고,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면서도 “소풍을 나온 것 같은 착각에 잠깐씩 빠져들”면서 서로에게 일어난 비극을 업고 다독인다. 「수원보호구역」과 「실버로드」는 인간이 빚은 고통이 인간 너머로 확장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수원보호구역」의 화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의 댐 건설에 반대하다 살해당한 혼령이다. 그는 자신의 무덤이 있는 수원보호구역에서 안식을 누리지만 보호가 해제되고 시민을 위한 쉼터가 건설되며 안락은 깨진다. 설상가상으로 화자는 자신의 무덤을 간간이 찾아오던 손녀가 힘든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부부의 일요일 아침을 그린「실버로드」는 비교적 일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수원보호구역」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통해 화자인 ‘나’는 아내와 낯선 노인의 갈등을 전해 듣고, 여린 줄만 알았던 아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라 메르(La mer)」는 애수와 미지라는 바다의 양면성이 작품 전면에 잘 배치되어 있다. 바다에서 양친을 잃은 주인공 ‘지섭’이 대학 시절 활동했던 요트부 선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요트를 가져오면서 겪는 심경의 변화를 그렸다. 표류에서 항해를 위한 삶의 진로를 모색하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통의 제물과 재생의 방식으로서의 소설 우리는 살면서 깨달은 바 있다. 그 사람[情人]이 아니면 사랑할 수 없음을. 정인은 대체할 수 없는, 아무나가 될 수 없는 작가다. 『만남의 방식』에서 그녀는 자신을 고통의 제물로 삼아 재생을 도모하는 종교적 의식을 치를 제사장처럼 보인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허망한 명제는 현실적인 힘을 얻는다. 치유가 영영 불가능할지라도 상처를 덮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독자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작가 정인의 소설집 『만남의 방식』 은 그래서 한 자루 펜으로 드리는 기원과도 같다.
<맑스에게 이별을> 오로지 생멸할 이름과 땅의 명칭이 다를 뿐 조금도 다르지 않은 민주와 공산 진영간의 투쟁,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이념과 사상의 대립. 6.25 동란과 너무도 흡사한 그리스 내전은 사상의 충돌로 인한 동란 앞에서 우리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케 한다. “선전 선동은 마술피리와 같아. 폭력이 정의가 되고 억압이 자유로 둔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빈곤이 평등으로변신하거든.” - 67p 살인의 음모 중 벨리온의 대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캐나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고 시청 공무원이 된 힐라 드미트리와 더글라스 항공사엔지니어로 일 하는 벨리온 창은 운명처럼 서로를 향한 사랑에 빠진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던 것도 잠시, 벨리온은 한국인 혼혈아 였던 그를 고깝게 본 힐라 드미트리의 오빠 알렉스와 마찰하고 공산당 조직하수인인 그의 친구들을 마주하게 된다. 1946년 마침 젊은 인텔리 남녀를 적극 포섭했던 그리스 공산당(KKE)은 미국과 캐나다까지 마수를뻗치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해 있으며 그리스어가 유창한 힐라는 매력적인 포섭 대상으로 다가왔지만. 곁에있는 벨리온 창의 존재는 꺼림칙하다. 그리스 공산당 캐나다 선전위원장으로 부임한 핀트로스 파고니로스는 알렉스와 그의 조직하수인과 폭력배들을 이용해 벨리온 창에게 누명을 씌우고 힐라로 하여금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도록 사건을 조작한다. 이념의 충돌과 폭압적인 세뇌로 갈라진 둘은 곧 전쟁의 파고 속으로 빨려 들게 되는데…. 서로를 운명처럼 사랑했지만 시대와 이념에 의해 갈라진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된 벨리온은 어떻게 운명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한 남자가 겪어야 했던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사랑의 이야기, 그리스 내전 속 둘의 드라마를 따라가 보자 에디터 추천사 그런 사상에 몰입하는 것보다 사…. 사랑이라는 것이…. 그래 솔직히 말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어. 당신 눈동자만 보고 있어도 난 행복해. 이게 내 답이야. -28p 마주친운명 중 힐라의 대사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사이에 신유라시아주의 신냉전 같은 이데올로기가 전쟁으로 현현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피해 함께 멕시코로 탈출한 러시아 남성과 우크라이나 여성의 결혼기사를 보았다. 어떤 이념도 전쟁의 파고도 사랑을 막지는 못한다는 반증이 아닐까싶다. 1940년대 중반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내전으로 점철된 시기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이 서로다른 이념을 품은채 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스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벨리온 창과 힐라 드미트리의 이야기는 이념에 앞선 개인의 감정과 삶과 사랑이 어떻게 역사를 뚫고 재현 되는지 보여준다.작가의 필력과 인터뷰 자료수집을 통해 탄탄하게 구성된 소설은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는 지정학적 위기와 이념의 갈등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