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타오르던 그 밤, 수국(秀國)이 무너졌다. 복수의 씨앗을 품은 채 홀로 살아남아 가려(佳麗)라 명해진 새로운 세상에조용히 스며든 수국의 마지막 공주 설아.소아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그녀는어느 날 가려의 세자 윤의 도움을 받게 되고,왜인지 그와의 우연한 만남은 거듭되는데……."또 보러 와도 되는가."닿아야 하여 닿았으나 비틀려 버린 인연의 끈.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두 사람의 가혹한 운명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했다.카카오 페이지 X 루시노블 공모전 당선작! <연(戀) 사랑하는 사람아> 지금 만나보세요~!--<미리 보기>“돌아서지 마라. 제발.”제발 너만은 내게 등을 보이지 마.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는 사람처럼 윤의 목소리는 한껏 거칠어졌다.“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럴수록 네가 떠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너를 만나는 것이 아니었어. 내 마음은 그날 다 내려놓았을 터인데 어째서.“아무래도 내가 너를…….”돌아서 있는 소아의 손을 잡아 당겼다. 떨림이 손을 타고 전해져 윤의 심장을 더욱 떨리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윤을 올려다보며 소아가 여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서 다른 대답을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드밀었다. 누구를 향한 부정의 고갯짓인가.“아니다. 은애한다. 내가 너를 은애해.”
“손.” 홍연은 ‘내가 무슨 강아진가.’ 하는 생각을 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소매 밖으로 나온 하얀 손바닥 위로 짙붉은 주머니가 놓였다. 황제의 단정한 손끝이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분명 그녀가 받고자 한 것은 간택의 탈락을 상징하는 청낭이었다. 그러나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어떡해.” 작게 새어 나오는 혼잣말과 함께 붉고 아리따운 홍낭은 결국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예부상서부의 치명적 문제아, 천방지축 서홍연은 언니를 대신해 가면을 쓴 채 얼굴 한번 보이지 않는 황제로부터 재인의 첩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가면 너머의 황제와 홍연을 얽어매고 마침내 두 사람은 잔인한 황궁의 암투 앞에 서게 되는데……. 암투에 맞서 결국 냉혹한 칼을 빼 든 황제. 그리고 그 칼 앞에 서게 된 홍연. 과연 홍연은 상처 가득한 황제를 끝까지 품어낼 수 있을까.
“어쩌지요. 전 태자비를 품을 마음이 없는 것을. 은애니 연모니 그런 생각은 더더욱 없음입니다.” 해온의 장공주 우서담. 쌍생의 불운을 넘어 살아남은 그녀는 자신의 언니인 황제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고 싶지 않아 스스로 가안의 화친혼에 응한다. 그리고 오랜 기억 속의 인연을 떠올리며 가안의 태자 유천우의 태자비로 백년가약을 맺는데……. 천우의 차가운 한마디에 화려한 금실 자수가 빼곡하게 채워진 화사한 휘장 장식과 휘황찬란한 주렴 장식들이 흑백으로 빛을 잃어갔다. 신방 어느 곳에도 화사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리 사십시다. 평소 동궁에선 남처럼. 동궁 밖에서 필요할 땐 부부처럼. 서로의 나라에 적당히 도움을 주며.” 하지만 그녀는 마음 한 자락 나누지 않은 채, 남들 보기만 좋게 그럴싸하게 그려 놓은 것처럼 부부 생활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꺾어드리지요.” 부부가 될 인연이라기엔 퍽이나 휘휘하고 살벌한 그들의 첫발이 이렇게 떨어졌다. 같은 방향이 아닌 정반대의 방향으로.
“흠집을 내고 흔적을 남기는 것도, 잘라내든 찢어내든 바스러트려 없애는 것도 다 나만 할 수 있어.” 신분이 필요했던 천민 출신 남작 클렌 폰 르쉘. 집안의 빚을 갚을 돈이 필요했던 백작가의 영애 라비안 애들레이드 폰 엘더. 고귀한 품격, 우아한 기품, 고고한 자존심, 드높은 자부심까지. 목적이 분명한 결혼임에도 클렌은 라비안의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을 보면 이상하게 허기가 져.” 혹독한 부모를 둔 덕에 너무나도 새하얬던 것이다. 하나, 하나 손수 가르쳐 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게 딱 마음에 들었다.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그녀를 제 손으로 물들여 온전히 제 것으로 삼을 일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클렌은 이 결혼을 완벽한 불행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내 것에 상흔을 내려 하는가.” 거대한 장신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고 억지로 벌렸다. 제국으로 거듭난 글라디오스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황제가 된 칼리오드 로르칸 글라디오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약혼자였던 공주의 배신으로 부모와 가문을 모두 잃은 비운의 공자, 킬리언 클리안 리지더스. ‘누구 마음대로.’ 칼리오드는 그녀가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는 걸로 생각했다.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 놓고, 감히. “당신께 오는 길이 어땠는지 감히 상상이나 되십니까? 제 마음에 드는 전리품 하나 정도는 가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칼리오드는 아까와는 달리 무슨 보물이라도 만지는 양, 퍽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그사이 얼어붙은 피가 뻑뻑하게 그의 손에 엉겼다. “들으라. 클리페스의 공주, 엘라나 리타 클리페스를 나 칼리오드 로르칸 글리디오스의 아내이자, 제국으로 거듭난 글라디오스의 황후로 책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