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오늘 함께 있어 주세요.” 어설픈 꽃뱀이었다. 여자의 눈은 아련하게 얼굴을 훑었다. 빈정대는 대답에도 하룻밤을 제안하는 여자의 설득은 파격적이었다.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단호한 대답은 자극적이었고, 강우의 이성은 박살 났다.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하룻밤으로 끝날 인연은 사무실에서 마주친 순간부터 운명처럼 송두리째 바뀌었다. 하룻밤의 대가로 이루어진 채무계약은 그의 한마디에 달라졌다. “민 채경이 변제해야 할 금액을 3개월 사귀는 걸로 대체하지.” 그의 눈이 진지했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통보야.”
그녀는 4년간 이상적인 정략결혼 상대자였다. 이현이 무표정하게 물었다. “앞으로 나랑 이혼할 생각 있어? 그럴 마음 없다면 아이 하나는 낳는 게 어때?” “저도 찬성해요.” 서린은 둘의 관계가 한걸음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비즈니스같이 결정된 첫날 밤. 잠들었던 서린은 돌아서는 이현의 손을 잡았다. 이현의 눈빛이 깊이를 알 수 없게 어두웠다. “이서린. 네가 먼저 잡았어. 잊지 마.” 4년동안 평온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폭풍을 만난듯 쉼없이 변해갔다. 이현의 마음을 원하던 서린은 고백과 함께 마지막을 말했다. “나 당신 좋아했어요. 많이.” 그녀의 미소가 슬펐다. “이혼해요, 우리.” 실체가 없는 감정은 믿지 않던 그의 마음에 균열이 생겼다. “이서린, 이혼 축하해. 이제, 우리 연애하자.”
“나랑 오늘 잘래?”“......”늘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고백부터 하던 남자.반복되는 거절에도 좌절도 없던 남자.모든 남녀 사이의 처음을 선사한 너와 남녀 사이의 정점도 마지막으로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짝사랑을 너의 마음에 발화하고 너의 시간 속에서 사라졌다.5년 후 눈앞에 나타난 지훈의 눈빛은 달라졌다.그의 목소리조차 고압적이었다.“잘 숨어 있지 그랬어.”몸을 숙여 귓가에 닿는 숨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이렇게 내 턱 밑에 숨어 있으면 찾아 달라는 거잖아. 안 그래?”이성이 사라진 지훈의 본능이 신아의 모든 것을 탐닉하기 시작했다.지훈은 다시 사라지려는 신아를 옭아매었다.“내 앞에서 사라지는 걸 허락한 적 없어.”
“엉망인 채로 내 차에 뛰어들어서 길바닥에서 주웠어.”위험에 처해 기억까지 잃은 가현은 그에게 그 정도의 존재였다.기억을 잃은 그녀가 매달릴 곳은 잔인할 정도로 매서운 눈매에 고압적인 태도의 그뿐이었다.기억상실로 힘겨운 트라우마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가현은 뻔뻔해 보여도 살기 위해 매달렸다.“이 불안한 머릿속을 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잊게 해줘?”노을빛을 받은 냉정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에 하데스가 겹치는 환상을 본 것 같았다. “사라지게…… 해주세요.”그녀는 위험한 그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사랑 따위 믿지 않는 남자에게 길들어 사랑에 빠진 가현의 운명은 가혹했다.“저와 결혼해 주세요.”“내가 아니라 내 몸이 필요하겠지. 말 같지 않은 사랑 따위 운운하지 마.”“만약… 네가 내 여자가 되면… 죽어서도 나한테서 못 벗어나.”인연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의도치 않은 악연이었다.이미 길들여져 각인된 마음이 악연까지 잊혀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