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가득 붉은 해넘이가 아름다운 화곡마을. 공보의로 고향에 돌아온 소꿉친구 은태와 8년 만에 재회한 하현. 멀어져야만 했던 이유 같은 건 잠시 바람에 묻은 채, 하현은 굳게 다짐했다. 그와 예전처럼 가까워지기로. “나… 그, 머리 아파.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꾀병인 것 같으니까 나 나가본다.” 우선 꾀병 부리기는 실패. “너 변태야?” “그러게. 나 진짜 변탠가….” 탄탄해진 그의 몸을 훔쳐보다 걸리기도 여러 번. 그렇게 기웃기웃 마음이 기울던 어느 날. “우리가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윽고 마주한 은태의 서글픈 진심 앞에서, “…너는 괴로워하지 마. 내가 네 몫으로 남겨 둔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현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는, 서은태란 가을에 함빡 물들어버렸으므로.
어릴 적 함께 자랐던 장현과 서인. “우리, 죽는 날까지 다신 보지 말자.” 스무 살, 서인이 아버지를 잃었던 그 겨울밤. 서인은 영문도 모른 채 장현에 의해 낯선 곳으로 도망 보내진다. 다른 이름, 다른 신분이 되어 기약 없이. “어디다 뒀어? 네 애비가 남긴 거.” 그러나 9년 후 서인은 아버지를 죽인 조경천에게 납치되어 의문의 ‘물건’을 내놓으라 요구받는다. 그리고 조경천의 곁에 있는 낯선 얼굴의 장현. “정말 여태… 조경천 밑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죽은 너희 아버지 밑에서 일할까. 나도 내 살길 찾아야지.” 재회한 장현은 서인을 감시하며 싸늘하게 제안한다. 한 달의 말미 동안 ‘물건’을 기억하고 찾아내라고. “네가 그나마 믿고 있는 우장현이 얼마나 개새끼인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지.” 살기 위해 애쓰던 서인에게 드러난 진실의 그림자. 서로를 속이며 번지는 찬연한 복수의 불씨. “한번 넘어와 봐, 오빠도. 그렇고 그런 사내새끼들처럼.” “…그래? 그럼 벗어 봐.” 빠듯이 시선이 얽힌 순간, 장현은 제 안에 꿈틀거리던 비틀린 욕망을 마주했다. “지금 바로, 내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