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잘못 태어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한수혁 넓고 커다란 남자의 등은 마치 고아 소년의 그것처럼 외로워 보였다. -설수연 ***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장미 송이를 안겨 주면서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는 말을 들려주는 연인처럼 그는 더러운 말을 하고 있었다. 한수혁을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치밀어 올랐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수연을 꽉 채운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냥 안아 주고 싶었다. 타인을 동정할 처지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가 불쌍했다. 그의 불쌍함이 수연에게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의 불쌍함을 견딜 수 없었다. 수연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이나 불쾌함보다 그의 불쌍함과 고통이 더 쓰라렸다. 자존심을 잃는 것보다 그를 불쌍함 속에 혼자 두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 남자의 나직한 음성 때문에, 너절한 제안이 담고 있는 그 조용한 말투 때문에 가슴의 살점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있었다. 이 이상하고 병든 감정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것은 연민일까? 한수혁은 마약 같은 이상한 힘이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랬다.
[15세 개정판]노는 남자를 만나서 쿨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한 예하.담백한 여자를 만나서뒤끝없이 정리했다고 생각한 창헌.각자의 이유 속에서 둘은 깔끔한 이별을 선택한다. 이별 후의 씁쓸함을 인정하지 않는 창헌 앞에 예하는 임신이란 폭탄을 던지고. 신뢰할 수 없는 남자의 아기를 원하지 않는 여자 앞에서허창헌의 인생은 꼬여가기 시작한다. 신예하, 넌 내 아기를 어떻게 하려는 건데?내 아기를 없애려고 하는 거야?허창헌, 내 자궁은 당신 아기를 위한 공간이 아니거든. 당신이 남긴 한 방울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거든.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기 힘든 그들의 이야기
“정태인 씨, 소보루빵 하나 더 드실래요?” 서정은 예의상 권하면서도 태인이 먹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그러죠.” 포크를 버려두고 손으로 소보루빵을 먹는 정태인.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씩이나. 오늘 밤은 정태인이 보통의 남자 사람처럼 보인다. 두 사람이 보통의 부부거나, 친구가 된 것 같다. 망설임과 간절함을 최대한 숨기면서 서정은 태연하게 말했다. “정태인 씨.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해봐요. 그 부탁.” “정태인 씨가 출장 간 동안 친구 집에서 출근하면 안될까요? 이 주 내내는 아니고 며칠 정도라도 괜찮아요.” 순간 옅은 웃음이 태인의 입술에 맴돌았다. 둥근 곡선으로 휘어지는 입매와 함께 균형 잡힌 얼굴 전체가 부드러워진다. “고서정 씨가 꽤 아끼는 친구네. 내가 나갈 때마다 같이 살고 싶어하는 친구라.” “어차피 이주 간은 잠자리 업무도 휴업이니 일종의 휴가 비슷한 개념인가?” 서정은 태인의 입술에 머무는 미소가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고서정 씨는 워라벨도 없잖아. 시답잖은 행사에 얼굴 도장 찍고 돌아와서 야간 격무에 시달리는 셈이니 이거 내가 너무 미안해지네. 한데, 내가 나눠쓰는 취향이 아니라서⋯⋯.” 입매는 웃고 있지만 회색 눈동자는 겨울처럼 얼어있는 괴상한 남자.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는 친구에게 참으라고 말해요.” 사람을 일회용 종이컵 취급하면서 웃는 남자. 어리석게도 또 잊어버렸다. 목적이 없을 때는 결코 친절한 적이 없는 남자라는 걸.
당신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살면서 나를 아쉬워 해봐.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아파봐. -이민하 씨, 피임이나 똑바로 해요. 그와 결혼할 여자가 민하에게 했던 충고였다. 민하의 가슴에 먼저 칼날을 박은 것은 이 남자였다. “남들 눈을 신경 쓸 거 없잖아. 어차피 너는 서울을 뜰 계획이라며?” 그는 지금 해외 파견 근무를 신청한 민하를 비난하고 있었다. 나쁜 놈. 이 남자는 내가 한국에 남아 상간녀 역할을 해주거나, 혹은 독일이든, 루마니아든 처박혀서 현지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부문장님,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세요?” 손가락으로 미끈한 가슴 근육을 간지럽히듯 쓸어주자 남자의 상체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최선을 다해 잘해 주자. 어차피 끝날 사이였다.
영화 보는 것도 안 되고, 드라이브도 못 하고, 오피에서……. -나랑 둘이 할 수 있는 건 오피에서 노는 거밖에 없다? 이게 또 발작 버튼 눌렀네.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작한 거 아니니? 그런 거 싫으면 안 보고 살면 되잖아. 우리는, 기수현과 나는 안 보고 살면 서로에게 훨씬 유익하고 건전한 관계가 된다. 안 보고 살면. -차암 편리해. 붙어 있다가 걸리적거리면 치워버리고. -그럼 어쩌라고. 남자 때문에 내 인생 꼬이는 거 싫거든. 네가 무슨 내 첫사랑이라도 되니? 개 같은 이겨울의 첫사랑. 수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 . . . 내가 죽는다면. 이겨울은 어떤 마음이 들까? 기수현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이겨울은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을까? 기수현이 이토록 쓸쓸하고 황량한 돌과 흙더미 사이에서 실연의 상처를 안고 한 줌의 먼지로 사라져버린 것을 알게 된다면 이겨울은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수현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겨울이 기수현의 묘지에서 통곡하며 몸부림치는 장면도 꽤 마음에 들었다. 나한테 잘해 준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