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헌은 정상적이지 않은 출생이었지만 지금은 최고의 자리에 있다. 하지만 주변은 온통 그를 씹어 삼키려는 적들뿐이다. 힘겨웠던 과거가 남긴 불면증과 신경증에 시달리던 강헌은 당돌하고 발칙하게 자신을 유혹하는 여민과 위험하리만치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후 강헌의 불면증과 신경증을 최악으로 몰아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강헌은 여민을 사건과 연관된 자로 의심하여 덫을 놓는다. 의심하는 남자와 의심을 풀고자 하는 여자가 서로에게 서서히 빠져드는 사이 위험은 다른 모습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까. 잘못했다고 엎드려 빌어야 하나. 여민의 눈동자가 커다란 눈 속에서 어지러이 흔들리는 것을 쳐다보며 남자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늦었어.” 남자는 그녀의 갈등을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조용한 공간에 내려앉는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묵직했다. “도발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남자의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남자는 단단하게 매듭지어진 넥타이를 비틀었다. “그 못된 입이 울면서 애걸하게 될 거야.” 집요하게 달라붙는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태우고 또 다시 얼렸다. 그 눈빛에 사로잡힌 여민이 그를 불안하게 마주 보았다. 다시 한 걸음을 성큼 내밀며 남자가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벗을수록 더욱 거대해 보였다. “신사라….” 아까 여민이 말했던 단어를 읊조리며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입술을 더 길게 늘였다. 이제 남자는 침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민의 여린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신사인 건 옷을 입었을 때뿐이거든.”
요조는 숨기고 싶은 과거 때문에 시커먼 안경과 어두운 화장, 허름한 옷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꽁꽁 감추고 산다. 그녀의 유일한 목표는 족쇄와도 같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멀리 떠나는 것. 힘들게 모은 돈으로 마침내 미국으로 떠나기 삼 개월 전, 오래전 자신에게 친절했던 단 한 사람인 그가 임시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아 그녀의 곁으로 온다. *** “그러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두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누구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은 여전히 서로의 것과 꼭 맞닿아 있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두 입술이 얕은 욕망을 토했다. 어떡하지. 완전히 붙들려 버렸다, 그에게. 팔도, 시선도, 마음까지도. 조금만, 조금만 더 기적을 바라도 될까. 무엇 하나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주제에 감히 바라면 안 되지만, 그래도 딱 한 번만 욕심내어 보면 안 될까. 딱 한 번만 미쳐보면 안 될까. “… 안아주실 수도… 있나요?”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다. 주제를 모르고 탐을 내고 말았다. 그를 언짢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요조가 다급하게 변명을 붙였다.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되니까…….” 이번에 놀란 눈을 홉뜬 것은 요조였다.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그녀의 입술이 겸후에게 통째로 삼켜져 버렸다. 요조의 심장이 비 오는 거리 위로 툭 떨어졌다. 제 궤도를 이탈해버린 심장은 이어지는 뜨거운 키스에 제자리를 찾을 새가 없었다. “하아…, 신요조 씨 부탁 기꺼이 들어줄게요.” 겸후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힘있게 꽉 끌어안았다. 긴장한 겸후와 더 긴장한 요조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저 날뛰는 심장이, 요동치는 머릿속이, 빨라진 걸음이 그들을 겸후의 오피스텔로 순식간에 옮겨갔을 뿐이었다.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집안에 눈치 없이 태어난 넷째 딸 은남은 어려서부터 차별받고 자라 설움이 많다.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들어간 모델하우스에서 형편에도 맞지 않는 아파트를 덜컥 계약하고 만다. 하지만 부푼 가슴으로 입주한 아파트는 청사진과 달리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일 뿐이고, 설상가상 그녀의 앞집에 이사 온 젊은 남자는 은남이 술에 취해 남자의 집에 잘못 들어갔던 걸 핑계로 자꾸만 그녀에게 밥 좀 달라고 하는데……. 그런데 과연 정말로 밥만?*** “궁금하면,”조금 느슨해졌던 기찬의 팔에 다시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뒤통수를 그대로 꾹 눌러버렸다.“네가 직접 확인해보든가.”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만큼 떨어져 있던 두 입술이 갑자기 촉, 달라붙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은남의 두 눈이 눈알을 쏟아낼 듯이 휘둥그레졌다. 기찬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것이 그녀의 입술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꼼짝 못 하고 뒤통수가 붙들려 있는 은남의 입술에 대고 기찬은 자신의 것을 아주 꼼꼼하게 비벼댔다. 앙증맞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은 후에 오른쪽으로, 이번에는 다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여 다녔다. 숨이 가빠지고 다물렸던 은남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려는 찰나에, 기찬의 입술은 갑작스러웠던 접촉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떨어져 나갔다.“어때?”“뭐, 뭐가?”“내 입술. 어떠냐고.”“괘, 괜찮네.”물론 입술이 다 나아 이제는 괜찮은 것 같다는 소리였다. 마주 닿은 그의 입술은 보드라웠고 조금도 거치적거리는 곳이 없었으니까.그런데 대답하고 보니 어째 입맞춤이 괜찮다는 것처럼 들렸다.그런 의도가 아예 없지는 않았던 듯 기찬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 “그날.”은남의 뒷머리 깊숙하게 손가락을 찔러넣은 기찬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은남은 심장이 뒤통수에 달라붙어 버린 듯, 심장까지 간질거렸다. “나, 혀도 데었는데.”기찬이 만지작거리던 은남의 뒷머리를 다시 훅 끌어당겼다. (15세개정판)
* 15세이용가로 개정된 내용입니다.세상에 단 하나뿐이던 남동생을 잃고 그저 건성으로만 살아가던 새연은 오랜 친구까지 외국으로 가버리자 처음으로 연애를 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잘해보고 싶었던 남자친구는 그녀 외에 어린 파트너가 있었고, 실망한 새연은 남동생과의 추억이 있는 제주로 여행을 떠나버린다. 생전 처음 혼자 떠난 여행에서 그녀는 가방도 잃고 지갑도 잃고 미아가 되고 마는데, 남동생의 죽음 이후 연락 한번 없던 남동생의 친구가 느닷없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다. 너무도 짙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서.***순간 새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졌다. 지욱이 그녀의 여린 손목과 손바닥을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엄지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목 안쪽을 살살 문지르더니 손바닥 안쪽까지 둥글게 간질였다. 그래봤자 손목이고 손바닥일 뿐인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의 손이 닿지도 않은 목덜미 위로도 찌르르 가는 전류가 흘렀다. 이 숨 막힐 듯한 분위기에 감각마저 이상해진 것 같았다. 그 사이에도 지욱은 새연의 손바닥 구석구석을 매만지고 쓰다듬고 문질렀다. 새연이 손을 빼야겠다는 생각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때, 그녀의 손바닥을 종횡하던 기다란 손가락들은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를 애태우듯 간질이다가 마침내는 그 사이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이만큼 벌어진 두 개의 침대 사이에서 두 손이 단단하게 깍지를 끼고 하나로 결합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욱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어떻게 해 줄까?너무나도 명백한 신호를 주고서 그는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결정은 오로지 새연의 몫이라는 듯. 그래, 안 될 게 뭐야.오늘 난 슬프고 분노하고 절망했는데.가방도 잃어버리고 지갑도 잃어버릴 만큼 어이없고 멍청하기도 했고.그리고 취했으니까. 분명 취했을 거니까. 이런 오늘에 미친 짓 하나 더 보탠들 뭐가 문제인데.새연은 깍지 낀 손을 잡아끌었다.오늘이 아니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속삭이며.“……이쪽으로 올래?”
아무리 괜찮은 남자를 만나더라도 라정의 애정은 그의 털과 함께 공존하지 못했다.가슴 털이 수북해서, 다리털이 빗질해도 될 만큼 길어서, 저녁만 되면 수염이 듬성듬성 올라와서, 여름날 넓은 소매통 안으로 들여다보인 겨드랑이가 무성해서. 그녀의 애정과 흥분이 사그라지는 이유는 늘 ‘털’이었다.아무리 취향에 맞게 잘 조리된 맛깔스러운 음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구불거리는 털을 발견한다면 한순간에 입맛이 뚝 떨어져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그런 그녀에게 오래된 친구 녀석이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내 거라도 털 뽑고 보여줄 수밖에.”
“여사님께서는 홍채하 씨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8년 전 아빠를 빼앗아 갔던 여자는 어느 날 아빠의 부고와 함께 1억짜리 수표를 보내왔다. 조건은 아빠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 빡빡한 형편에 1억은 너무 큰 돈이었다. 채하는 차마 되돌려보내지 못한 수표를 손에 쥐고 한강 다리 위에 섰다. 오늘만 울려고. 그리고 잊으려고. 그런데, “안 돼!”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남자가 다짜고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그녀에게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젊은 사람이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그녀야말로 묻고 싶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당신 뭐야? 미친X야, 변태야?” 앙칼지게 따져 묻던 채하는 문득 제 손에 마땅히 들려 있어야 할 것이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떡해.” 오른손에 꽉 쥐고 있던 하얀 봉투. 1억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봉투가 보이질 않았다. 채하는 다리 난간 너머에서 일렁거리는 강물을 쳐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내 1억.”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배경 설정은 허구이며 현실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