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려는 게 아니오.” 머물 곳이 사라진 겨울 앞자락에 만난 그 사내의 이름은 거련. 처음부터 잔잔히 흘러가던 내 일상을 깨뜨렸다. “나와 함께 가는 건 어떻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의 손에 글을 적었다. ‘뭐든 다 할 거예요.’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것 아니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젓고 다시 글을 적었다. ‘함부로 아니에요. 거련이라서 하는 거예요.’ 그 직후, 거련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돌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다소 퉁명스럽고 거칠게 얘기했지만 깜짝 놀라거나 겁먹지 않았다. “난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오.” ‘意中之人’ 마음 깊이 품은 사람이라는 그 글자를 나 역시 가만히 그의 손등에 써 보았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오.” 손발이 떨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데도 나는 오히려 그의 허리춤에 팔을 둘렀다. 마치 그러면 병이 낫는 것처럼 그에게 더욱 더 매달렸다. 언뜻 머리 위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들렸지만 그 또한 나를 놓거나 뿌리치지 않았다.
<연을 품은 임금님> “지상에 내려온 걸 진심으로 감사하오.” 아비의 눈을 뜨게 하고자 공양미 삼백 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죽었구나 싶은 순간 기포에 싸여 용왕국에 온 그녀는 용왕의 병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고, 그 답례로 커다란 연 속에 몸을 싣고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조선의 지존 지헌은 궁 안팎으로 후사에 대한 우려와 묘한 소문을 낳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할 즈음,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여인을 점지해주는데……. “그리하면 중전의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지요.” 지헌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붉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던 지헌은 영문을 몰라 하는 청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것으로 내 마음을 대신하겠소.” 청이는 그토록 왕이 보고 싶어 한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소중히 하겠사옵니다.”
주완이 연아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대었다. 덩달아 연아의 심장도 쿵 떨어졌다.문득 그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아의 손을 실수인 듯 아닌 듯 건드렸다.새끼손가락끼리 살짝 닿는 정도의 접촉이었지만 연아는 전기가 통한 것처럼 크게 느꼈다.“…너무 늦었는데 이제 가서 쉬어야지?”“응.”그런데 대답과 달리 주완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주완의 손이 다시 그녀의 손을 스쳤다.실수 같기도, 장난 같기도 한 담백한 접촉이었는데 연아는 그 두 번 만에 목이 탔다.하마터면 주완을 주려고 타 온 꿀물을 식히지도 않은 채 벌컥벌컥 마실 뻔했다.그때 주완의 새끼손가락이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얽혔다.그게 전부였다.하지만 그것만으로 숨 쉬기 힘들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연아는 더 이상 그에게 언제 가냐고 묻지 않았다.다만 흐트러진 숨소리를 들키지 않게 숨을 꾹 참고 그와 고요히 시간을 공유했다.두 사람의 손가락은 여전히 얽혀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자신의 죽음과 저승사자와의 조우. 그런데…. “도원우 씨는 오늘 자 명부에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게 실수였다? “도원우 씨에게 세 가지의 선택지를 주죠.” 이어진 저승사자의 제안. 첫째, 뒤틀린 운명을 감수하고 다시 살아난다. 단, 그럴 경우 망가진 영혼 때문에 수명이 앞당겨질 수 있다. 둘째, 그냥 이대로 죽고 새로운 삶을 받아 다시 태어난다. 재벌 2세, 운수 대통, 천재, 원하는 게 무엇이든 고객 맞춤 환생 서비스. 저승사자 PICK! 강력 추천. “세 번째로 망가진 영혼을 치유해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우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안녕.” 그의 운명을 바꿀 한 사람과의 만남.
절뚝거리는 걸음에 과거의 악몽이 끈질기게도 따라붙었다. 살아지길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윤도화의 삶이었다. 권수혁, 그 남자를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서 진상 손님과 시비가 붙은 평범한 하루였는데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도운 수혁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곤란한 상황일 때마다 우연처럼 또 운명처럼 마주치는 수혁. 그는 도화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그녀는 수혁에게 기대가 생겼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점차 몸집을 키운 그 감정들은 수혁과 도화를 가파른 운명으로 이끈다. 도화가 가까스로 유지하던 일자리와 평온한 삶을 잃은 날, 수혁이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다. 정직하게 적당히 돈을 버는 일과 돈은 많이 벌지만 조금 나쁜 일. 그리고 그녀는 후회할 걸 알면서도,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위험한 남자와 지독하게 얽히는 쪽을 택하는데……. “고려해 볼 만한 사람들 중에서 네가 가장 예뻤어.” “한동안은 소꿉장난에 만족해. 진도는 네 속도에 맞출 테니까.”
갑작스레 존폐 위기에 놓인 프로그램 <스타 관찰 일기>. 시청률을 올리지 못하면 방송도, 자신의 목숨 줄도 날아간다. 은우의 유일한 희망은 NBA에서 포인트 가드로 뛰고 있는 성재희 선수뿐. “PD님 나 알죠?” “그럼요. 우리나라에서 성재희 선수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원하던 답이 아니었을까. 묘하게 가라앉은 낯을 한 재희에게 은우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방송에 출연하지 않은 그를 섭외하기 위해서.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거야.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었던 거야?” 그러나 그리운 듯 애틋한 듯 중얼거리는 말에 은우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방송을 성공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감인지, 또 다른 이유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