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믿진 않으나 연애는 한다. 강도를 후려칠 만큼 무모하지만 밤길 뒤따라오는 남자는 무섭다. 7년 전, 남 일이라고만 여겼던 데이트 폭력을 겪은 이후로 다시 남자를 만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사랑 따윈 엿 먹으라는 회의주의자지만 그럼에도 나 좋다는 남자는 만난다. 왜냐고? 외로워서. 다만 쉽게 속을 보여 주진 않는다. 마음을 내주지도 않는다. 집 주소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위험한 짐승이다. 서른셋 시린 가을에 나 좋다는 남자 둘이 나타났다. 동갑 약사 도경우와 봐 줄 거라곤 지나치게 잘난 외모밖에 없는 레스토랑 견습생 권수혁. 따지고 잴 것도 없이 전자가 낫고, 이미 전자와 만나고 있고, 훗날 생각에 없는 결혼을 하더라도 전자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일곱 살이나 어린 권수혁,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내가 좋다는, 내 막말에 일곱 번 상처 받지만 여덟 번 일어나 돌진하는 얘가 자꾸만 좋아진다. 어쩔 수 없다. 태어나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자신보다 내가 소중하다는 널, 내가 어떻게 이겨? 그런데, 어젯밤부터 자꾸 내 주변을 맴도는 저 남자는 누구지.
내가 생각했던 어른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씹다 버린 껌처럼 재미없는 내 인생에 기적처럼 나타난 너.“차해경 씨 맞죠?”아니라고 하고 싶었지.“결혼이 그렇게 중요한가.”그러니까, 그거 하면 사는 게 좀 재밌어지려나, 그뿐이었어.“지금 어디야?”고작 내 말 한마디에 넌 어쩜 그리도 필사적으로 내게 달려왔는지.“좋아해. 좀 됐어. 당신은 몰랐겠지만.”여덟 살이나 어린 네가 남자로 느껴지다니 나 진짜 미친 거지? 희수야. 세상 모든 게 맛없게 느껴지던 어른 여자가세상 어떤 맛도 느낄 수 없는 어린 남자를 만났을 때.어른의 맛.*이 작품은 19세 종이책을 15세로 개정한 버전입니다.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곧 추락의 발명이라고 했다.그러니까, 널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이 순간은 예정되어 있었다.열아홉, 네가 내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변함이라곤 없는 날 깨달았을 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려나 연락을 끊어놓고도 타인을 통해 듣는 네 소식은 차마 끊지 못했을 때, 우연이지만 필연처럼 널 재회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가슴부터 뛰었을 때.이런 날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언젠가 네게 고백하게 될 거라고. 그 고백이 실연을 의미한다는 걸 알면서도.“네가 좋아. 좋아했어. 오래 전부터.”낮은 담장을 넘어온 금목서의 달콤한 향기가 무거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하필 23.5도로 기울어져 사계절을 만드는 지구처럼너에게로 기울어진 내 마음이 또 다시 계절을 바꾸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공식에 예외를 만드는 일이다.예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현수는 그 예외였다.고작 이런 스킨십을 거절당했다고 서운해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김현수가 그런 날 눈치채고 미안해하는 게 싫어 웃는 나는 더 낯설었다. 김현수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난 후부터 나는 여태 모르고 있던 내 그림자를 벌써 수백 개쯤 발견하는 중이었다.다시 걷기 시작하는 김현수를 따라 보폭과 속도를 맞췄다. 초여름의 아침 햇살은 눈이 부신 데다 뜨겁기까지 했지만 참을 만했다. 성적은 배구부보다 더 개똥이면서 연습에만 열심인 축구부가 만들어 내는 소음도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느라 갯지렁이만큼 느리게 걸으며 앞을 막고 있는 저 오타쿠 자식도 이해해 줄 수 있었다.김현수가 옆에 있으니까.제게 꽂힌 내 시선이 거둬지지 않자 의아함을 느낀 김현수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 저쪽 구석의 고물 자판기를 가리켰다.“마실래?”웃었다.“오렌지 주스 말고 사이다.”널 처음 마주쳤던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