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진해에서 일어난 의문의 방화, 살인 사건. 사고로 오빠와 그의 친구를 잃은 보라는 삼촌을 따라 교토로 떠나왔다. 하지만 매일 밤 그 순간의 악몽을 반복하고, 밤마다 깨어나는 야수는 그녀를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러던 어느 봄, 벚꽃 사진과 함께 나타난 한 남자. 그는 또 다른 피해자의 동생이라며 그녀의 곁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데……. 밤의 기억을 잃은 여자, 화보라. “내가 떠올리는 것들이 진실인지 허상인지 알아야 겠어요.” 그녀의 기억이 필요한 남자, 민휘경. “진실을 알고 싶은 거야. 복수는 그 다음.” 그녀가 기억에서 지워 버린 그날 밤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서글픈 진실의 앞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잔인한 봄날에 덮쳐 온 로맨스. 그날 밤, 그녀는 살인자를 보았다.
낡은 판잣집. 벽채로 쓰인 나무판은 비바람에 지쳐 옹이 자리마다 뚫려 있고, 마르고 젖기를 반복해 가벼운 손짓에도 부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나무 경첩이 부서진 문은 안을 다 가리지도 못한 채 흔들리며 삐걱거렸다. 문 위에는 희미해져 알아보기도 힘든 글자가 적힌 간판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용하리 만큼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나마 보이는 끝 글자가 루(樓) 자와 닮아 보이니 아마도 술집이었던 모양이다. 새벽 어스름 끝자락에 문 안으로 어지럽게 널린 술병들과 질서 없이 놓인 탁자와 의자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헌데 이상한 것은 산속의 외딴곳임에도 밤 벌레의 울음소리조차 없이 고요하다는 것이다. 아니, 고요하다기보다 음음(陰陰)하고 적막(寂寞)했다. 마치 죽음의 시간이 내려앉은 듯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다. 사박, 사박, 사박. 너무도 조용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