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하. 무엇이 널 이렇게 변하게 한 거지?” 분을 참지 못한 성현이 그녀의 입술을 짓씹듯 삼켰다. 빨갛고 말캉한 그녀의 혀를 자신의 것으로 옭아매려는 순간, “……!” 급히 유하에게서 물러난 그가 퉤, 피가 섞인 타액을 뱉었다. “이제 상무님이 제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여자가…… 변했다. “착각하지 마. 이 관계를 끝낼 수 있는 건 나야.” 차가운 성현의 말에 유하는 실소했다. 전부라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한 순간, 유하는 삶을 놓아 버렸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날로부터 수개월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이게 제 운명이라면, 엿 같았던 그와의 관계부터 깨부수기로.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가 당신 때문에 눈물 흘리는 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제야 숨 막히는 을의 굴레를 벗어난 것 같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다소 민망하게 시작된 선진제약 부회장 강우와 선진제약 디자인 팀 신입 사원 정겨울의 인연. 어쩌다 보니 강우의 고양이 삼 남매인 봄, 여름, 가을이를 돌보게 된 겨울은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강우와 부딪치면서도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낀다. “가족들이랑 다 같이 캐나다로 갔다면서, 왜 굳이 혼자서 돌아온 건지 궁금해져서.” 강우의 물음에 겨울은 따뜻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억 하나를 들려준다.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이름 모를 남자애와 점박이 고양이. “그래서 왔어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고,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공포에 질려 있던 겨울. 다른 사람들보다도 유독 어둠을 무서워하던 그녀. 강우는 그 공포의 기저에 드리운 베일을 점점 벗겨 가는데……. 과연 두 사람은 잃어버린 겨울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얼어 죽어도, 겨울》. * * *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는 거 같습니까?” 겨울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로 그에게 시선이 붙들렸다. “여긴 내 집이고.” 그가 한 음절 한 음절 씹어 뱉듯 끊어 말했다. 그의 말이 귀에 박혀 들어왔다. “여길 매일같이, 겁도 없이 함부로 들어와서 무방비하게 잠까지 자고 가는 여자를.” 강우가 뻗은 손끝이 겨울의 턱에 닿았다. 감싸듯 쥐어 오는 그 손길은 여전히 홧홧했다. “내가 언제까지 곱게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터질 듯 뛰어 대는 심장은 그녀의 갈빗대를 둥둥 쳐 댔다. 겨울은 몸을 바짝 굳힌 채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강우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가까워서 피할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그를 피해 그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등에 식탁의 유리 면이 닿았고, 그대로 등과 고개가 뒤로 휘어지듯 꺾였다. 그녀의 턱을 어루만지던 뜨거운 손길이 어느새 목 뒤로 가서 그녀의 상체를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대답해 보세요. 정겨울 씨.”
8년 만에 이태경이 나타났다.“오랜만이다. 하은하.”차분히 내려앉은 까만 눈과 그보다 더 어두운 눈빛.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처음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20년 소꿉친구, 그 연결고리는 은하 저만이 간직해 왔던 것처럼.“등신처럼 굴지 말고 나 이용해. 네 약혼자 같은 쓰레기 따위나 만날 거면.”하지만 별안간 나타난 태경은지치고 상처받은 제 모습을 오래전부터 지켜본 것만 같이 말했고.“……이러면 안 될 것 같아, 태경아.”“입 다물어. 이제 할 거니까.”숨을 몰아쉬기 무섭게 그가 입술을 맞붙인 순간우린 선을 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