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대로 이 혼약을 지속시킬 의지가 나에겐 없다. 지금 당장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고 때가 되면 분명 이 일을 바로잡을 것이다. 첫날밤, 자신의 왕비가 된 여인에게 그리 말한 사내. 한 나라의 왕이란 지위를 갖고 있으나, 사람을 쉬이 믿지 못하고 마음마저 어느 한 곳에 머물게 못하는, 어찌 보면 외로운 자, 의종. 제 매몰찬 말에도 상처조차 입지 않은 그녀가 의종은 도리어 신기하고 거기다 그녀의 의문스러운 행동마저 그의 호기심을 자꾸만 자극하는데. -분명 전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저를 폐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신첩은 폐비가 된 것과 진배가 없습니다. 전하의 말씀은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허면 신첩은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이제 지아비가 아닌 전하 앞에서 스스로 옷고름이라도 풀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첫날밤, 지아비가 된 사내에게 곧 소박을 놓겠다는 말을 들은 여인. 도리어 그렇다면 저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상처조차 입지 않을 만큼 남자를 믿지 못하는 그녀, 단영. 얌전히 앉아 구중궁궐 속 꽃으로 사는 것보다 흉한 분장과 남장을 한 채 궁 밖에서 돌아다니는 게 더 성에 맞는, 허나 그런 모습이 도리어 의종의 호기심을 사는 것조차 모르는데.
사회부 기자로 일하다가 안 좋은 일을 겪고 사직한 뒤하릴없이 백수생활을 영위하던 나에게 어느 날 생긴 일.대학 선배이자 현재 살고 있는 이층집의 주인,정화 언니의 시동생이 줄곧 비어 있던 2층에 살게 된 것이다.느닷없이 한집에 살게 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물을 뿌린 듯 기운 없이 늘어진, 길이가 제각각인 흑색 머리에6개월 이상 햇빛을 보지 못한 듯 파리하고 창백한 피부,얼룩 한 점 없는 하얀 셔츠의, 까다로운 느낌이 풍풍 풍기는 남자라니.게다가 결벽증이라도 있는지 이사 오자마자온 집 안을 소독약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어 버리고음식 냄새를 유난히 싫어하는 채식주의자이기까지 했다.서로 신경 끄고 각자 지내면 그만이련만,남자가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고, 제 몸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남자가 내켜 하지 않는데도 난 일주일간 그를 돌보기 시작한다.그리고 점차 남자의 미스터리하고도 조용한 모습에 이끌리게 마는데.
혼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아 혼자 있던 내 옆으로어느 날 불쑥 다가와 혼자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윤.중 3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년 뒤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떠난윤을 그리워하며 치열하게 고 3을 살아가던 난,독서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중충동적으로 윤과 자주 갔던 롤러장 터로 간다.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 것은,윤과 함께 롤러장에 갔다가 이래저래 불편하고도 묘한 기억을 선사해 준이름도 몰라 제멋대로 'K'라고 명명한 그 아이였다.그날 이후 난 'K'와 자주 부딪치게 되고,윤이 없어 다시 혼자로 돌아간 내 옆으로'K'를 비롯한 사람들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한다.그리고 굳게 닫아 놨던 마음의 문과 함께잊고 있었던 무언가도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플러스(Plus)> 2004년 종이책 출간작입니다. 혼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아 혼자 있던 내 옆으로 어느 날 불쑥 다가와 혼자 있는 것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윤. 중 3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년 뒤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떠난 윤을 그리워하며 치열하게 고 3을 살아가던 난, 독서실을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충동적으로 윤과 자주 갔던 롤러장 터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만난 것은, 윤과 함께 롤러장에 갔다가 이래저래 불편하고도 묘한 기억을 선사해 준 이름도 몰라 제멋대로 "K"라고 명명한 그 아이였다. ‘윤아. 오늘 나, 네 꿈을 꾸었어. 너의 생각을 평소보다 많이 했었는지 갑자기 꿈에 나타나는 거야. 기다리라던 3년이 아직 채 되지도 않았는데 네가 먼저 나타나서 많이 놀랐어. 그런데, 그게 꿈이란 걸 안 건 말이지. 내 앞에 너처럼 나타나서 떨어진 그 아이 얼굴이 너와 달랐거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솟구쳐 올라 나를 향해 날아왔던 사람의 얼굴이 네가 아닌 거야.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나는 너를 알아볼 수 있는데 그 애는 아니었어. 그래, 그래서 꿈이란 걸 알았지. 하지만 꿈이라곤 해도 그렇게 짧게 끝나게 되어 너무 안타까웠어. 비록 얼굴이 다르다 해도 말이야.’ 그날 이후 난 "K"와 자주 부딪치게 되고, 윤이 없어 다시 혼자로 돌아간 내 옆으로 "K"를 비롯한 사람들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굳게 닫아 놨던 마음의 문과 함께 잊고 있었던 무언가도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