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한테 책임지라고 할까 봐 겁나요? 그쪽 같은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 아이가 절대로 모르게 할 거야.” 기억에도 없는 하룻밤으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생겼다. 지우라는 협박도 통하지 않는 스물네 살의 아이 엄마는 좋은 아빠가 될 게 아니면 책임질 생각도 말라고 한다. 난 좋은 부모를 가져본 적도 없고, 아빠는 처음인데……. 그게 가능할까? “내가 언제 같이 살면서 애를 책임지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다 필요 없다고요. 왜 내 아이가 당신 호적에 들어가고 당신 성을 따라야 하는데요?” “기껏 생각 바꿔서 미혼모 딱지 떼어주고 애도 내 자식으로 인정해주겠다는데 거절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쪽은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변덕을 부리고 있는 거죠. 나는 내 인생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키기로 했어요. 당신 인정 같은 거 없어도 나랑 아이, 행복하게 잘 살 거라고요.” ▶ 작가 소개 현아진 건강하고 느린 삶을 지향. 겨울과 여행, 바다 속 동물을 사랑한다.
“평생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나 봅니다.”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을 끝을 알고 있었다. 일강그룹의 후계자와 그의 조모를 돌보던 요양보호사의 관계는 짧고 찬란했다. “임신 사실을 감추게 할 만큼 쓰레기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웃는 낯으로 영아의 배를 바라보는 무건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날카로웠다. “처음부터 혼자 낳아 키우자고 결정했었어요. 정말이에요.” 무건은 얼얼한 뺨을 간질거리는 영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못 믿겠습니다.” 느릿하게 귓불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뒤통수를 감쌌다. “친부를 눈앞에 두고도 문란한 변명이나 지어낸 여자를…….” 영아를 데리러 온 그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유괴범 주제에 인사성은 바르네요.” 겨울 바닷가를 등지고 나타난 기헌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집채만 한 힘을 갖춘 그에게 소혜는 애원했다. “아무것도 안 바라요. 예온이 키우는 것만, 딱 그거 하나만요.” “키워 놓기만 하고 생색내지 않겠다고.” 그러나 기헌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법적 보호자도 아닌 네가 뭘 할 수 있냐는 듯이. “그걸 덥석 믿어 줄 만큼 내가 순진하질 못해요.” 하지만 찰나의 변덕은 두 사람의 관계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었고, 그저 부모 잃은 조카를 위해 제시한 3개월짜리 이별 준비 기간은, “임소혜 씨는 ‘네’ 하고 대답만 잘하세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결혼이라는 소꿉놀이로 바뀌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