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요, 너와 만난 순간에야 비로소. “꽃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흩날리는 은륜화의 붉은 꽃잎 속에 선 이령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한데 너무 고와서 조금은…… 슬플 지경이에요.” 내뱉은 말과 달리 이령은 가호를 향해 다시금 활짝 웃어 보였다. 앞만을 향하던 날카로운 은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가호의 미간이 드러나지 않게 구겨졌다. 파랗게 맑은 하늘, 희고 보드라운 구름떼, 빗방울처럼 날리는 붉은 꽃잎 그리고 그 속에 선 작은 계집아이. 점점이 아롱지는 빛에 무언가 움직였다. 오랜 시간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내부의 공간이 짧게 요동쳤다. 가호의 시선이 느릿하게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무감하게, 그저 끝없는 공허만을 담은 것처럼 그렇게. 곧이어 그는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걸었으나 균열은 멈추기는커녕 점점 더 깊숙하게 번져가고 있었다. 혼요, 너에게 닿는 손끝에서 비로소.
티끌 하나 없는 피부와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까지. 명서에게 희고 깨끗하다는 건 숙명인 동시에 저주였다. 짙고 황폐한 어둠의 나락, 휴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다른 무엇보다 새까맣고 가파르게 날카로워 스스로 나락을 뚫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태초의 존재에게 이름과 사명을 받아 신이 되었다. “신은 어떤가요? 그 자체로 완성되어 행복한가요?” 불행하고 남루한 인간이 묻고, 흐트러짐 없이 고귀한 신은 답하지 못했다. 허나 이 하나만은 알았다. 자신은 명서라는 계집에게서 답을 찾고 있다. “잘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이 좋은 분인지 나쁜 분인지……. 뭐, 결국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야 하겠지만.” “내 어떠한지 모르겠다고 하였지. 답해 주마. 나는 완벽히 어둠에 속하는 자이니라.” 인간 계집은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또 완벽하게 달랐다. 그래서 꼴 보기 싫고, 그러면서 완벽하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휴는 스산하게 웃으며 희다 못해 은빛이 흐르는 명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고요한 숲을 뒤흔드는 계집의 웃음소리, 달콤한 숨 냄새, 반짝이는 눈동자.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지 않아도 명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계집을 궁금해 했던 거로구나, 이 내가. 가늠할 수도 없는 어둠의 사내와 빛처럼 날아온 인간 소녀라. 모순되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어둠 안에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는지 모를 일이다. 저 작은 것에 휘둘리는 일 따위 결코 없을 것을 자신하였건만…….
<울게 될 거야 (무삭제판)> 아홉 살의 고백은 어렸고 서툴렀다. 열 넷의 고백은 필사적이었지만 쓰라렸다. 그러나 열아홉의 나딘은 어떤 고백도 하지 못한다. 사랑이란 일방적인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검에 묻힌 핏방울의 무게를 깨달아서, 오랫동안 바라봐온 그만은 행복하길 바라서, 그래서 차마 이 짝사랑을 다시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한다. 그러니 잠시 머물기만 할게. 이 마음은 봄꽃처럼 피었다 고요히 저물고, 난 당신 곁에서 조용히 사라질게. -본문 중에서- 환영처럼 맺히는 제이더의 모습에 나딘은 웃고 말았다. 열에 들뜬 눈에 헛것이 보이나 보다. 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 어둠처럼 아득하고 매혹적인 눈동자, 선이 곧고 아름다운 콧날과 붉고 매끈한 입술. 나딘은 그 하나하나를 천천히 매만졌다. 시작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이 오랫동안 좋아해 온 사람. “그만…….” 감각이 사라져 가는 손끝에 맺힌 온기마저 착각이겠지. 나딘은 사랑하는 남자의 환영을 끌어안고 숨 쉬고 웃고, 애원했다. “이제…… 놔줘.” 여기서 더 깊어지면 어떻게 살아야 해? 그러니 이제 그만 당신에게 붙들린 날 놔줘. 나딘은 쿡쿡 웃다가 고개를 묻고 눈물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사그라져야만 할 감정이 어여쁘게 쓰라렸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찬란해 눈이 부시면서도 시퍼렇게 가슴을 멍들이곤 했다. 아픈 건 익숙한데, 포기도 능숙한데 그만은 도드라져 쓰리고 또 쓰라렸다. 그럼에도 나딘은 굳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만은 고백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황제의 심장을 깨우다> 위이각~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면, 채울 수 없음에 또한 처절한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기에 고요할 수 있는 나의 일상을 멋대로 흔들지 마라. 네 어깨를 누르는 운명이 그런 것이라면 처음부터 내 곁에 두어서는 아니 되었던 것이다. 허나……그래, 알고 있다. 이미 그런 네 운명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겨 버린 것을. 마음마저 얼린 채, 그렇게 고요하게 사는 것에 익숙한 이각. 하지만 서걱거리던 빙벽을 환한 미소로 녹여버리는 한 사람을 만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해율, 그대를 닮은 세상을 위해. 주해율~ 주씨 집안에서 태어나 몸에 베인 습관처럼 숨죽여 살았습니다. 제멋대로 짐 지워진 제 운명 따위도, 그것이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지만 않는다면 평생을 따라 다닌다고 해도 썩 나쁘지는 않다 여겼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낯선 감정들을 가르치려 하지 마십시오. 솔직하게 살고픈 이유가 당신이 되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릇된 예언이 가지고 온 풍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곱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해율.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궁방을 도우며 매일을 씩씩하게 살고 있는 해율의 동그랗게 맑은 눈동자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소채은~ 당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그 마음을 원하는 내가 두려워져 택한 길이었어요. 한 순간도 제게 눈길을 주지 않는 당신께 그래도 고운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싶었기에. 헌데 당신의 그 넓은 가슴이 그 아이를 향해 활짝 열리는 순간, 눈물보다는 원망이 앞서네요. 진도현~ 숨기려 하여도 스스로 깊은 빛을 내는 자네를 한 번도 시기한 적 없는 나라네. 내 부모가 가진 자욕(恣慾)이 신물이 나는 만큼, 자네의 푸른 물 같고 산 같은 담연한 모습이 안타깝기까지 하였지. 그런 자네가 처음으로 핍절하게 원하는 이라는데, 자꾸만 내 안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이 바람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태휘~현 청유국의 황제.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지만 아직 후사가 없다. 몹시 예민하며 신경질적이고 광기와 살기만이 가득한 메마른 눈동자를 가졌다. 제좌에 대한 집착이 지독하여, 이각을 반쪽짜리 황족이라 무시하면서도 언제든 그를 제거해야 속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녹풍(綠風)~ 그것은 초여름 푸른 잎을 스치며 부는 시원한 바람. 이제 선연한 녹풍 한 자락이 불어와 얼음물 속 깊이 잠겨 있던 아름다운 붉은 물고기를 깨워낸다.
<달빛이 나비치다> 에피루스 베스트 로맨스소설! 연무록. 단지 밀약으로 시작되어 처음부터 끝을 예정하고 있던 사이였다. 헌데 건조하게 마른 눈동자에 자꾸만 담겨오던 그 아이의 미소를 차게 외면하면 할수록, 가슴속에는 따스하고 고운 달빛이 나비쳤다. 그 인연을 아프게 놓쳐버린 후에도……. 이제 다시 만난 너를 어찌 하면 좋을까. 희노. 마지막 남은 꽃잎을 남겨두고 떠나온 것은 가슴속에 원망이란 그림자로도 그가 남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솔직한 눈동자로 늘 웃고 있던 계집아이 대신 어엿한 무사가 되었으니 더는 그때처럼 마음을 보여 상처를 입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구슬프게 떨어져 내렸던 인연의 꽃잎에는 마음을 담은 향기가 여직 남아 있을까. 무록과 희노, 두 사람의 그때 그리고 다시 만난 지금에도 달빛은 나비친다.
<황후의 자격> 에피루스 베스트로맨스! [아유] 일곱 해 전에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소화 부부가 거두어 주었다. 과거에 대한 것은 제 이름 ‘아유’를 제외하고는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소화 부부는 발견 당시 열 살 정도의 어린 소녀가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목숨을 위협당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여 아유에게 남장을 시켜 길러왔다. 열일곱이 된 지금, 소화와 함께 해선지방에서 만두를 빚어 팔며 살고 있는데, 만두 빚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나, 그 외에는 다소 무지하고 순박하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는 몹시 투명하고 어여쁘지만 아직은 덜 자란 사내아이처럼 씩씩하고 튼튼하기만 하다. [사량헌] 화운국의 제23대 황제이며, 이제 스물다섯의 나이에 맞지 않게 냉철하고 엄격한 판단으로 나라를 이끌고 있다. 어린 시절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사미랑의 섭정 때문에 제 자리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권력에 욕심을 품고 자신을 시해하려 한 사미랑을, 충신 단제우의 덕분으로 처치하였으나, 그 일로 아버지처럼 의지했던 단 장군을 잃고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더욱 심해졌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뛰어난 통치력과 위엄을 가진 황제이나, 낯선 이들을 믿거나 곁에 두려 하지 않아 아직 곁에 후궁조차 없다. 이에 대신들이 혼사 문제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일곱 해 동안 찾아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단제우의 여식이라야 혼인을 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황후에 올리려는 진기천의 음모로 황후의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두의 달인, 아유라는 소녀와 만나게 되는데……. [진명주] 대신들 중에 욕심이 많기로는 으뜸이며 눈치 또한 빠른 진기천의 딸이다. 어릴 때 부터 화려하고 아름다워,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아버지 기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엄격한 황후수업을 받았다. 외모는 가히 천하절색이라 일컬어지나, 제 아비를 닮아 이간질에 능하고 투기와 욕심이 극심하다. 아유를 궁에 들여보내고 놀이친구, 혹은 그녀의 황실 적응을 돕겠다는 핑계로 황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대신들과 황제의 눈에 들고자 노력한다. 기품이 넘치고 성숙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자신을 무시하고 천박하고 무식한 아유 계집에게 눈길을 주는, 저 냉엄한 황제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태하] 실제로는 진기천의 막내아들이지만 본부인이 아닌 그녀를 모시던 노비 태주의 몸에서 난 이유로 한 번도 진씨 가문의 일족으로 대접받은 일이 없다. 과묵하고 검술이 뛰어나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살고 있으며 진기천의 호위 무사의 한 명으로 지내고 있다. 이복누이에 해당하는 명주가 황실에 드나들면서 그녀를 모시고 다니는 일을 명받았으며 세상의 더러움과는 거리가 먼 아유와 마주 치는 일이 잦아지게 된다. [단아유] 단제우가 남긴 유일한 자식이자, 량헌의 시해 음모가 있던 때에 사미랑들에 의해 납치되어 행적이 묘연해진 소녀. 살아있다면 열여덟이 되었을 소녀지만 아직도 생사조차 불투명한 상태이다.
배 한 척 얻고자 섬에서 추방 당하는 여자와 혼인 했다.바다의 저주라는 그녀라면 살아갈 이유 없는 제 삶을 망가트리고 부숴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고, 딱 그 정도가 이 혼인에서 바라는 전부였다.그런데 달각거리는 얼음 소리가 들렸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그리고 깨달았다.이미 온통 눈부신 세상이었다. 모닉, 너와 함께여서.[미리보기]“그러니까 절대 잊지 마.”당신은 이제 돌아올 곳이 있어.그건 언제나 내 옆이 될 테고, 난 웃으며 반겨 줄 거야.“기다리고 있을게.”답지 않게 이별이 두려워져서 모닉은 크립트를 심장 가까이 바짝 당겼다.[본 도서는 15세이용가에 맞게 수정&재편집된 도서입니다]
마력이 권력이 되는 위터락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가우디얼 가문의 후계자, 레스터. 꿈을 꿨다. 나는 망가져 형체도 알 수 없는데 네가 곁에 있어 행복한. 그런데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는 귀족 학생들 가운데서도 최상 클래스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빼어난 외모, 넘치는 부와 명예,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레스터는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는 냉소적인 인물이다. 저주스러운 비밀 때문에 타인에게 냉담하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세계는 적막하고 황량하기만 하다. 실라 아스티안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력이나 귀족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아스티안의 소녀, 실라. 지키겠다고 했잖아. 내가 널 끝까지 지킬게. 하지만 넌, 몰라도 좋을 것 같아 모종의 사건으로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받아 들여 마법학교 클리아론으로 오게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레스터와 그의 비밀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서늘하고 냉정하기만 했던 레스터는 불처럼 활활 타올라 물러섬을 모르고,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자 하는 실라는 불구덩이 앞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두 사람의 간절한 바람, 우리 끝내 사랑이 아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