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하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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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화옥엽

<루화옥엽> “내 사람이다,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 내가 먼저 마음에 품었거늘……. 한데, 왜…… 왜……!” 절규하듯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절박을 담아 퍼진다. 그러나 이내 사방의 삭막한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서 그리, 메아리도 없이 사라진다. -내 사람이다,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어. 내가 먼저 마음에 품었거늘……. 한데, 왜…… 왜…… 어째서! 그리 소리치지 않으셔도 알고 있습니다. 은월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다시금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귓전에서 불안하게 경련하는 그의 가슴이 느껴져 더욱 가슴이 에인다. 어찌 헤아릴까, 어찌 헤아릴까…… 곧게 자신만을 향해 있는 그 눈빛을 알면서도, 그리 잔인하게 모른 척, 보지 못한 척, 알지 못하는 척. 자신은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한 사람이던가. “소하령…….” 다시 만나면, 그리 불러 달라고 자신이 말했었다. 그때는 이 부름이 이리도 가슴 아플지 가늠도 못 했었다. 잊힌 이름이라서, 잊어야 하는 이름이라서 억울한 마음에, 그저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런 부탁을 했었다. 그리 가볍게 넘겼었던 약속이 지금에 와 이리도 사무치게 아플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차라리 알려 주지 말 것을. 당신과 나 사이에 어떤 겨를도 두지 않아서, 그저 봄날의 산들바람인 듯 가벼웠던 옛날의 만남은,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잊어서…… 아무렇지 않게,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태자와 황후, 그 법도만큼의 거리를 두고 만났다면 좋았을 것을.

백접비무(白蝶飛舞)

<백접비무(白蝶飛舞)> 백접비무는 루화옥엽의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전작을 읽지 않아도 흐름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구성하였으나, 감상의 수월함을 위해 루화옥엽을 먼저 보시길 감히 추천드립니다. - 월하백향 드림- 두 초상화가 전해진다. 한쪽은 누가 보아도 맹수의 눈매를 가진 폭군을 연상시키는 그림이요, 다른 한쪽은 준엄한 위엄을 떨치고 있는 성군현제의 모습이다. 이리 양 극단을 달리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동일 한 사람, 바로 태위제국 2대 황제, 광종이다. 광평 역사상, 후대에 가장 양분된 평을 받고 있는 태위제국 2대 황제, 광종 휘무제. 그의 일생에 단 한 명 뿐인 여인 소하령. 그들의 어긋난 인연에 관한 숨겨진 이야기. 루화옥엽 그 후. [미리보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 다급한 발자국 소리. 전장의 매캐한 공기 속에서도 갑작스레 끼쳐오는 이질적인 향기는 은월이 익숙한 향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안아든다. 청유는 자신의 앞을 막는 병사를 베어내고 섬광처럼 도약했다. 순식간에 병사들 머리 위를 넘어선 그는 곧장 쓰러진 은월을 들어 안았다. 쌕쌕 고통에 찬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입가는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아……, 폐하…….” “그만 말하지마.”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그녀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감싸 쥐는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공포. 기백의 군사들 앞에서 혈혈단신 홀로 서 있을 때조차, 일말의 두려움도 없던 남자가 지금은 행여 그녀를 잃을까 무서웠다. 은월을 안은 청유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나를, 나를 놓으세요……. 어차피…… 나를 죽이지는……, 못할…… 쿨럭…….”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말하던 은월은 다시금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냈다. 자신을 안고 있는 채로는 그는 제대로 방어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의미를 담아 은월을 자신을 놓으라고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병사의 창을 한 손으로 쳐내고 나서, 그러나 그는 그녀를 더욱 자기 품 안으로 숨기듯 끌어안았을 뿐이다. “폐하, 제발…….” 당신의 목숨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황제의 어깨 위에 얼마나 만큼 이들의 생명이 걸려있는 줄 아느냐, 그녀는 그리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숨을 쉬는 것조차도 폐부를 칼로 도려내듯 극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통에 은월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대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녀의 귓가 바로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러니, 같이 죽든지 아니면 같이 살아.”

블러디 공작

“그러니까 저것이…….” “저것이 아니라, 아가씨입니다. 주인님.” 공작은 작게 미간을 구겼다. 비딱하게 소파에 기대앉은 그의 전신에서 감출 수 없는 고압적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아가 낳은 아이가 저거란 말 아닌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거’가 아니라 아가씨입니다.” 그는 다시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미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은 계집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스크 인형 같았다. 깜빡깜빡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 아래 드러난 눈동자는 선연한 붉은색. 희한한 일이군. 절대로 제 핏줄이 될 수 없음에도 이상하게 자신의 눈과 꼭 닮은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은 저주스러울 만큼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퇴색되고 둔화하여 잘 느껴지지도 않았던 어떤 감정의 한 귀퉁이였다.  은둔의 공작 가, 메이디스 가.  감히 그의 관 뚜껑을 열어 깨운 의문의 아이는 순진무구한 어린 짐승처럼 살랑살랑 웃었다.  “안녕, 디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고요하던 메이디스 성이 그녀로 인해 서서히 깨어난다. 마치 마법에 걸려있던 동화 속의 성이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경국지색

어느 날 눈을 뜬 하온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으나 기이한 위화감이 들었다. “원비마마.” 사람들은 자신을 그리 불렀다.설국 11대 왕, 해성군. 광기와 폭군의 대명사.그리고 자신은 그의 정비였다.“다른 계집들은 왕의 씨를 받아보겠다고 온갖 짓거리를 다 하는데.” 손목을 움켜잡은 그의 악력이 더욱 거세졌다. 통증에 본능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금색이 도는 기이한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노, 초조함,“정작 조강지처한테는 이리 매번 소박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 얼마나 우스울까?”그리고 통한할 만큼의 묘한 슬픔과 절박함.본능적인 위압감에 움츠러들면서도 하온은 이상하게도 그가 처연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나는 영악한 자라 이런 기회를 놓칠 마음이 없습니다.”얼마 만에 내게 곁을 내어준 것인데.홱 몸을 일으킨 융의 기세에 순식간에 제 몸이 바로 눕혀졌다.<[본 도서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도서입니다]>

황실비사

‘린, 나의 린.’돌이켜보면 이 여인은 제게 늘 그랬다. 초하의 무르익은 과실인 양 달콤한 듯했다가, 설산의 삭풍처럼 싸늘하고 혹독했다. 자신은 린의 앞에서 한결같이 순종적인 개였다.정작 단 한 번도 목줄이 잡힌 적도 없는데 그리도 멍청하게도, 제발 제 목줄을 끌어 달라고 안달하며 꼬리를 흔들어 대는 미련스러운 개.-지금의 강왕께서 대체 무얼 하실 수 있습니까?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반문 앞에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붉어진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만 볼 것만 같던 그가 빗물에 허물어져 내리는 토우(土偶)처럼 털벅, 무릎을 꿇었다.-린, 제발…….그 애절한 이름에 동요하는 대신, 설린은 차갑게 조소를 머금었다.-아, 그런 건가요. 설마, 나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 추억에 기대어 어리석은 아해들처럼 몰래 야반도주라도 해주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 이후에는요?한유검은, 그리고 설린 저는, 이름도 성씨도 없는 필부가 아니다. 그렇기에 당장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도피하면, 그 대가가 한두 사람의 목숨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그렇게 도망친 앞날에 도원경같이 낙원이 펼쳐질 것 같으십니까?어린 시절 헤어졌던 어느 낭자와 도령이 다시 만나 다복하게 백년해로했다는 이야기는 아해들이 좋아하는 구전설화에나 나오는 것이다. 현실이란, 설화처럼 달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