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만의 넷째 왕녀, 카놀라 F. 인카나 샤를만. 그녀는 왕좌를 둔 형제들의 싸움으로 인해 샤를만에서 쫓겨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트리폴 군주의 외아들과 혼인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혼인을 위해 험난한 겨울 산맥을 넘어 트리폴로 향하던 길. 마중 나온 트리폴의 후사, 정혼 상대인 에델을 만나게 되는데……. “왕녀님, 얼른 도도한 얼굴로 맞이하실 준비를…….” 카놀라는 그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정면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놀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돌아보았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저렇게 청순하고 예쁘게 생긴 남자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아! * “자신의 반려자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트리폴 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정식 부부가 되려면 멀었지만, 당신을 지키는 건 저의 일입니다.” 또박또박 말을 마친 에델은 타고 있던 짐승을 몰아 저만치 앞서가 버렸다.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카놀라가 천천히 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엔 빨간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봤어? 봤지? 거봐. 혼자 사랑하는 거 아니라니까?” 지금 엄청나게 왜곡된 시선으로 말의 의미를 해석을 하는 것 같은데?
승리했다고 믿은 순간,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죽었던 동생이 살아나고, 정적이었던 남자와 약혼하며, 연인이었던 남자와 날을 세우게 된 칼미아 플록스. 너무나 달라진 관계들 속에서 그녀는 이전 생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에 다가가게 되는데……. “감당할 능력도 없는데 바라기만 하는 건 욕심이다!” “네, 알아요. 저 욕심부리고 있는 거예요. 욕심을 허락 맡고 부려야 하나요?” 이번 생에도 그녀는 백작이 될 것이다. 운 좋게 얻어걸리는 작위가 아니라 제 힘으로 쟁취해서, 누구의 허수아비도 아닌 온전한 백작이.
가상 현실 게임 ‘바벨의 지하’의 NPC 이브. “저는 하늘섬 주민인 이브라고 해요! 절 도와주시겠어요?” 저주받은 탑, 바벨의 1층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도움을 청하지만 어째서인지 도전자들은 그녀를 공격할 뿐.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이브는 불현듯 깨닫는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을. 또한, 다시 눈을 뜨리라는 것도. ‘이상한 건 탑인가? 아니면, 자신인가?’ 몇 번의 죽음과 부활을 반복했을까. “네가 왜 여기 있지?” 이브는 처음으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GM 제로를 만나고 둘은 출구가 있는 지하 10층까지 동행하기로 하는데……. 이브의 목적은 하나였다. 이 끔찍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바벨을 탈출하는 것.
호호백발의 대부호 조앤시스 메나트를 꾀어내어 그의 유산을 독차지한 여자. 항상 검은 베일을 쓰고 다니는 젊은 과부, 클리비아 메나트.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익명으로 후원하던 학생과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뒤 줄행랑을 친다. 그러나 몇 달 뒤, 그들은 필연적으로 재회하는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왜 저 남자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야 메나트 부인의 호위를 맡기 위해서…….” “그러니까 왜 내 호위를 아틸론 경이 하느냔 말이에요!”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는 클리비아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아틸론 플로웨이. “혹시 저에 관해 묻지 않으시는 이유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까?” 자, 말해 봐. 우리의 관계는 우연일까, 필연일까?
리브 로데이스는 평범한 가정 교사였다. 아픈 동생의 약값을 위해 남들 눈을 피해 두어 번 누드모델을 했지만, 뒷모습만 그리게 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옆얼굴이 드러난 누드화를 누군가 사가기 전까지는. *** “신은 들어 주실지언정, 이뤄주시진 않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은 리브에게나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무언가를 이룰 힘을 가진 건 인간이네, 선생.” 나지막한 저음은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으나, 동시에 세이렌의 노래처럼 매혹적이었다. 내내 성상을 응시하던 벽안이 힐끗, 리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게 기도해 봐.” 후작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와 눈을 마주친 이 찰나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혹시 아나? 기적이 일어날지.” 일러스트: 유오
로다 킨시아는 황제의 충복이었다. 황제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로다는 마물 소환사였고, 어떠한 고대 마물은 아주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회귀한 그녀는 황제를 갈아치우기로 했다. “황좌에 오르세요, 대공 전하.” “위장도 정도가 있지! 나보고 이복형의 정부와 붙어먹으라고?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생각보다 도덕적인 관념이 올바르게 잡혀 있으신가 봐요?” “그러는 너는 도덕적인 관념이 엉망진창이군.” 설마하니 복수하는데 도덕심까지 필요할 줄은 몰랐지만……. “황제의 정부와 놀아나는 대공을 누가 지지하겠어?” “설마 측근들에게 저와 연애한다고 말씀하실 작정이세요?” 썩 괜찮은 복수의 시작이었다. “아니면 저랑 진짜 연애하고 싶으세요?” “……제발 그 미친 소리 좀.” 아마도?
“유산해도 이 결혼이 유지될 거란 확신이 들었나 보지?” 브리짓은 아이를 잃자마자 남편에게 고발당했다. 아인, 그 남자에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값어치를 매기는 남자였다. 그녀와의 결혼이 배 속의 아이에게 값어치를 매긴 결과라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고발은 그 값어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임신이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면, 신 앞에서 한 맹세는 시작부터 글러 먹었어.” 남편은 그들의 혼인을 무효로 만들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그가 아기의 존재를 부정한 순간, 브리짓은 완전한 이별을 결심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당신은 우리의 결혼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나?” 아인의 헛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굉장히 이상한 소리네요.” 모호한 표정을 지은 브리짓이 시선을 들어 아인을 응시했다. “애초에 우리의 결혼을 아무런 가치도 없게 만든 건 당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