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켜켜이 쌓였다. 같이 보낸 시간이 한 덩이, 건네받은 마음에 또 한 덩이, 모두 흘려보내지 못하고 쌓여 버렸다. “어느새 선배가 내 마음에 들어왔어요. 좋아한다는 감정, 사랑했던 마음 그런 거 이젠 설명하기 어려워요.” 사랑의 상처로부터 자꾸 도망치는 여자, 서지훈. “그때처럼 네가 울고 있지 않았으면 해. 그러니 넌 내가 걷는 속도만큼만 같이 걸어와 줘.”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녀를 붙잡아 주는 남자, 김민석. 우리의 숨결이 나른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문풍지처럼 바스락거렸다. 그는 풍랑이 되어 내게 파도로 밀고 들어왔다. 그렇게 나의 한숨은 그의 입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쓴맛의 과거에 좀처럼 무뎌지지 못하는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상처가 덮어질 수 있을까?“가끔 안부, 물으면 안 되겠지?”“싫어. 네 만족을 위해 코앞까지 끌고 와서 먹나 안 먹나 확인까지 하는 거 나는 불쾌해.”무뎌지지 못한 나는 너를 단번에 알아봤어도너는 기억조차 폭력이라 나를 한 번에 알아보지도 못했음을.그래, 내가 무슨 권리로 네가 잘 사나 그걸 확인하고 위안 삼을 수 있을까.그것은 이상한 동질감이었다.나는 엄마를 잃고 부서진 울타리 안에 살던 아이였고,너는 그 부서진 울타리 안에 잠시 머물던 눈치가 빤한 아이였지.우리는 그렇게 어쩌면 서로가 아는 슬픔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혼자서는 내내 흐르지도 못하고 고여 있다가마주한 뒤에야 서로에게 한 바가지씩 끼얹어져 흐를 수 있는 그런 존재들.“……우리 이래도 될까?”망설임이 묻어나는 가원의 눈빛을 본 유준이 잠깐 진한 숨을 몰아쉬었다.“네 눈에 내가 보여. 이제 다른 생각 못 하겠지?”아, 네가 말한 위로, 이제 알겠어. 가원은 까치발을 하고 유준에게 매달렸다.유준은 몸을 숙여 가원을 끌어안았다.“……가끔 안부 물어도 돼?”“나 많이 기다렸어?”오후부터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의 6월, 이른 여름.어제도 만난 이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