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을게. 혹시 어디 고장 나거나 물 안 나오면 말해.” “너는 진짜 여전하구나.” “뭐가?” “오지랖이 태평양인 거.” 주원은 곰돌이 캐릭터가 그려진 도시락 가방을 건네는 그에게 앙칼지게 묻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 넌 오지랖이 태평양이니? 이걸 왜 네가 가져다주는데? 등굣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딸기 할머니는 손녀가 깜빡 잊고 안 가져갔다며 도시락 가방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주원은 선뜻 단하에게 전해 주겠다며 도시락 가방을 받아 왔다. 그들은 같은 화촌중학교 2학년 5반이었으니까. 하지만 유난히 하얀 피부가 짙은 자줏빛 체크무늬 교복 상의와 대조되던 여자애는 파르르 떨며 그가 내민 가방을 확 낚아챘다. 그러고는 당황한 그를 지나 교실을 나갔다. 주원이 피식 웃으며 단하에게 물었다. “내가 오지랖이 태평양인가?” “태평양 맞지. 혼자 있는 애, 남들이랑 못 어울리는 애들 보면 그냥 못 지나쳤잖아, 예전부터.” 아아, 하던 주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널 못 지나친 건 아니었는데.” “응?” 열일곱에 헤어진 첫사랑이 화촌리로 돌아왔다. 그의 심장이, 상처받은 그녀의 심장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절대로 지울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흔적 미워할 수 없는, 새침한 매력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서은혜. 열여덟, 아버지의 소개로 의대생 윤태하에게 과외를 받기 시작한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자신과 같은 나이에 같은 일을 겪은 그녀에게 동질감과 호기심을 느낀다. 바쁜 아버지와 언니를 대신해 자신을 챙겨 주는 태하를 의식하는 은혜. 무뚝뚝하지만 섬세한 그를 만날 때마다 점점 마음이 커져간다. 태하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감싸 준 서 사장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통통 튀는 은혜에게 서서히 빠져든다. 하지만, 두 사람은 헤어져야만 한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서. 12년 후, 성형외과 의사가 된 태하의 앞에 냅다 차를 들이받으며 나타난 은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역시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찔한 교통사고와 같이 재회한 두 사람. 그러나 태하는 다시 한 번 다가온 그녀를 밀어내기만 한다. “나는 포기할 수가 없다. 내게 이건 마지막 기회니, 나는 그가 아니면 안 되니. 나는 도저히 그를 놓을 수가 없으니 이번에는 그가 포기하게 할 수밖에.” 그녀는 점점 더 매섭고 날카로워졌고, 그는 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져만 갔다.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창과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