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런 소후작의 모조품. 베일 후작 부인의 실패작. 루버의 부랑아. 그 모든 것이 그녀. 아니, 그를 칭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클로드 델 이하르를 만나기 전까지는. 클로드는 잠든 카닐리언을 고요하게 응시했다. 머리카락과 같은 금색 속눈썹이 하얀 얼굴에 연한 그림자를 만든다. 제아무리 야외 활동을 싫어한다 해도, 지나치게 하얗고 가늘다. 목엔 변성기의 상징도 도드라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사내들의 땀 냄새와는 질적으로 다른 향기가 났다. 후작저 곳곳에 피어난 라벤더 향일까? 아니면 강가에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의 향기일까. 향을 더 음미하듯 고개 숙인 그의 코끝에 닿은 보드라운 뺨. 카닐리언이 내뱉은 가는 숨결이 그의 관자놀이를 간질인다. 덩달아 맥박이 빠르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더욱 상체를 숙였다. 더 음미하고 싶다. 아니, 정확히는 맛보고 싶었다. 이 피부에 혀를 대면 어떤 맛이 날지, 소름 끼칠 만큼 궁금했다. ‘정말 미쳤나 보군…. 아니면, 미쳐가고 있든지.’ 자조하듯 탄식한 클로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상체를 숙여 커프스를 주웠다. 섬세하게 커팅된 에메랄드의 반짝임이 카닐리언의 눈동자 색을 떠올리게 했다. 그 사이 반대편으로 홱 기울어졌던 카닐리언의 고개가 아래로 푹 숙어진다. 상체를 숙인 채 커프스를 움켜쥔 클로드는 고개를 틀어 카닐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손바닥과 등, 두피에서부터 시작된 열에 진땀이 흘렀다.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매끄러운 리언의 입술에 사로잡혔다. 더위 때문일 것이다. 차 안을 가득 채운 더운 공기가 자신을 미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사내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테니까.
● <나의 상냥한 빌런에게>는 가이드버스를 기반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입니다. 극중 등장하는 설정 및 세계관은 기존의 가이드버스와는 차이점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극중 <센티넬>이라는 직업적 단어에 ‘저작권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두 개의 힘을 동시에 가진, 달리아 본클로제와 다섯 번째 회귀자 위르겐 악셀 에델레드.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선, 둘에겐 서로가 절실하였다. <본문 중> 달리아의 하얀 다리에 입 맞추며 무릎까지 올라온 그는 뚜렷한 만족감을 느꼈다. 제 세상에 새롭게 나타난 존재라 할지라도, 그래. 다른 이들과 다른 건 없다. 송구한 얼굴로 이러지 말라며 밀어내겠지. 저보다 높은 자가 무릎 꿇었다는 희열을 품위라는 가면 뒤에 숨긴 채, 곧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새치름한 얼굴을 할 것이다. 뒤꿈치를 움켜쥐었던 그는 말랑한 종아리를 쓸어올리며 무릎 뒤를 움켜쥐었다. 그러며 겁먹은 새처럼 떨고 있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 하지만 달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위르겐의 등줄기로 오싹한 쾌감이 날카롭게 스쳤다. 입을 가린 달리아는 괴랄한 희극을 본 사람처럼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 말간 눈에 무릎 꿇은 남자를 가득 담은 채, 숨겨지지 않는 혐오를 적나라하게 내비쳤다. 달리아의 다리를 움켜쥔 손에 무의식적인 힘이 실렸다. 그제야 움찔한 그녀가 위르겐의 방향으로 상체를 숙인다. 여전히 두 눈에 경멸과도 비슷한 감정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무슨 꿍꿍이십니까? 에델레드 경.” 독처럼 달콤한 음성이었다. 실소한 위르겐은 그녀의 다리를 놓아준 뒤, 무릎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검붉은 눈동자를 따라, 달리아의 고개도 움직였다. 고아하고 고귀한 위르겐 악셀 에델레드의 가면에 쩍, 금이 간다.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흘러내린 앞머릴 쓸어넘기는 남자의 눈매가 길어졌다. “이런…. 들켰나?”
감히, 강탈당한 나의 첫사랑을 되돌려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단지, 그 뿐. 하지만 그녀에겐 고작해야 외로움을 달래 줄 어린애일 뿐이었다. “나 외로운가 봐요.” 다시 냄비를 인덕션에 올려 레벨을 올리자, 미미한 진동음이 두 사람의 침묵 사이사이 스며든다. 답지않게 멍하니 그녀를 보던 이재헌이 일어났다. “그래서 나더러 샤워하고 가라고 꼬셨구나.” 라면 두개를 꺼낸 그녀의 미간이 볼썽사납게 구겨진다. “내가요?” “나 어떤 놈인지 알잖아요.” “그래서요?” “겉과 속이 다른 놈인 거 알면서 왜 잘해 줘요? 혹시, 그날…. 봤어요?” 이재헌의 목소리와 눈빛이 바뀌었다. 다가온 그가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다. 등을 보이고 있던 은교의 몸이 굳으며 목덜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났다. “선배, 좋아해요. 첫눈에 반했어.”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그것도 짓궂게 비틀린,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꾸며진 음성이었다. “나랑 소개팅했으면, 우리 이미 잤겠죠.” 일러스트: 명
밤이 물러나고, 서서히 숲 너머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간이 지고, 그의 시간이 밝아온다. 후천적 주맹증을 앓는 알리시아 W 에밀헤임.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세상을 다채롭게 물들이기 시작한 르한 아브 에스트리센. 그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이용당해 주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망설임 없이 내어주었다. 그에게 그녀는 수단이었고, 그녀에게 그는 목적이었을 뿐. 그래서 안도했고, 방심했으며, 아름다움에 질식하는 것도 모른 채 빠져들었다. 더는 그녀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르한은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유리의 숲으로. 일러스트 _ 델타
공원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어보는 것이 버킷리스트라는 여자. 그리고 누군가의 손을 탄 게 분명한, 유기된 품종묘 같은 남자. 철저하게 자기만의 틀과 매뉴얼에 갇혀 살던 다정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커피 박람회에서 우연히 김해다를 만나게 된다. 화려함 뒤로, 더러운 일들이 비일비재한 공간. 그곳에서 모종의 사건에 휘말릴 뻔한 해다 앞에 정다정이라는 여자가 나타났다. 본문 중 “도와줄까, 나도. 너처럼.” 그는 걸음을 내디디며 물었다.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무엇을 도와주겠다는 건지 확신하지 못하면서, 목구멍에 감긴 뜨거운 걸 뱉고 보았다. “어떻게?” 건조했던 눈동자에 서서히 이채가 돈다. 그건 마치, 투명한 막이 차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네가 정해야지. 나 필요한 거 아니었어?” 팔꿈치를 댄 채로 상체를 조금 굽히자 그녀와의 체격 차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미간을 좁힌 여자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무의식중에 동그란 이마를 엄지로 문질렀다. 눈을 치켜뜬 그녀가 슬그머니 그의 허리춤을 감싸 안는다. “그럼…. 일단, 사귀는 것부터 시작할까? 우리.” 내가 정한 매뉴얼대로. 일러스트: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