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련 붉어라> *종이책 버전으로 수정된 파일입니다. (이미 구매하신 분들은 내 서재에서 다시 다운로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운종가 시전 대행수의 무남독녀, 임운해. 바람처럼 나타나 자신을 구해 준 무혁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말 이름이 바람 풍(風)에 소리 음(音)인가요? 바람 소리, 이름이 예뻐요.” “예쁘라고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그래도 예쁜걸요.” “소저의 이름이 더 어여쁩니다. 한자는 어떻게 됩니까?” “구름 운(雲)에 바다 해(海)를 써요.” “운해, 구름의 바다라…….” 무혁이 나지막한 소리로 ‘운해’라고 반복해서 발음하였다. 겨우 이름 한 번 불리었을 뿐인데, 사사로우면서도 내밀한 무엇인가를 나누어 가진 것처럼 그녀의 두 뺨이 발그레 젖었다. “그대는 바람입니다. 고요하기만 하던 내 마음을 쉴 사이 없이 흔드는 바람.” 마음을 나누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요요한 달빛이 어지러이 춤을 추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스스로 물을 깎아 살을 찌우는 소금그 인고의 하얀 결정을 꽃이라 부르는 곳굵은 피딱지 내려앉은 해묵은 상처까지도 꽃이 될 수 있는 곳그 섬에 가고 싶다 “이강우 씨!”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랏빛 낙조가 동백꽃처럼 한순간에 후드득 지고 만 서쪽 하늘을 천천히 등지고 서는 강우의 모습이 가슴 시리도록 눈부셨다. 홍이는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가감 없이 들이닥치는 강우의 애잔하면서도 완고한 눈빛이 마냥 힘겨웠는지도 모를 일이다.“까만돌?”홍이는 이유 없는 울음을 와락 쏟아 내며 무작정 강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그를 안았는지 혹은 그가 그녀를 품었는지, 홍이와 강우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석양을 삼킨 핏빛 바닷물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본 콘텐츠는 15세 이용가로 개정된 작품입니다.]
첫 포옹, 첫 키스, 첫사랑.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필요 없었던 두 사람.서툴고 유치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소중하게 가꿔온 그들.그러나 찰나의 배신과 오해가 어린 연인을 덮치는데…….“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우연이든 필연이든 다시 만나는 날에는 너 가만히 안 둬.”그녀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고 복수를 다짐한 남자, 임태진.“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전부 내 진심이야.”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여자, 고은님.지독한 옛 기억에 눌려 차마 전하지 못하는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 대신두 사람은 서로를 가슴에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을까.이지아 장편소설 <미안하다는 말 대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맞아요, 나 겁쟁이예요. 약혼녀가 버젓이 옆방에서 자고 있는데, 침대로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누구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못 되거든요.” 보경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난달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당시 여행에 동행한 친구들 앞에서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만 그 치욕적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최소한 나한테 해명할 기회는 줘야지. 안 그래?” “무슨 해명이요? 술기운에 욕망을 어쩌지 못했다는 소리를 또 들어야 하는 건가요? 순간의 실수, 그저 짧은 외도였다고요?” “이봐, 너무 비약하지 말자고. 외도는 결혼한 사람한테나 적용하는 거지. 우리는 그저 약혼만 했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대충 접자고.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은 그저 단순한 결혼이 아니야. 집안끼리의 약속이고, 사업의 연장이지. 동일제약과 일성화학이 하나로 결합하면 단숨에 재계 삼위의 거대 그룹이 된다는 거 몰라?” “나랑 결혼하려고 한 이유가 바로 그거였군요. 재계 삼위 거대 그룹의 총수. 동일제약도 결코 작은 회사는 아닌데…… 사람 욕심이라는 게 정말 끝이 없군요.” 보경의 입가에 짙은 자조가 깃들었다. 형민이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소리냐는 듯 생뚱한 표정을 지었다. “돈과 권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 당신도 내가 사랑 때문에 청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사랑 없는 정략결혼인데, 서로 마음 맞는 상대 만나 화끈하게 즐기면서 살자고요?” “그렇게 못할 이유 없잖아. 안 그래?” 형민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죄의식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애당초 잘못했다는 생각조차 없는 것이 틀림없다. 문득 보경은 모든 일이 지긋지긋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