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鬼)한 그대에게> [제1회 허니문 웹소설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 설화를 바탕으로 한 실존 역사‧시대물] 서기 600년, 신라에는 두 개의 꽃이 있었다. 동백꽃처럼 붉은 피를 가진 ‘화랑’들이 그 첫 번째요, 복숭아꽃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 ‘봉화’들이 그 두 번째였으니, 그들은 모두 선문(仙門)에서 피어났다. “나는 이리도 짙게 너를 새겼는데, 너는 나를 조금도 담지 않았구나.” 성스러운 혼이 낳은 반귀반인(半鬼半人) 화랑, 비형 “저는 기생이 아닙니다. 화랑의 뜻에 따라 아무 때나 밤을 내어줄 마음도, 여유도 없습니다.” 귀신도 홀리고 죽일 수 있는 절세가인(絕世佳人) 봉화, 윤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 너를, 그리고 너의 인생을.” 한 많고 정 많은 급인지풍(急人之風) 수호신, 길달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세 남녀, 화랑의 본원 선문(仙門)에서 만나다! ‘좋아한다.’ 노을 진 언덕처럼 따뜻한 이마. ‘좋아한다.’ 연못가의 수풀처럼 보드라운 눈썹. ‘좋아한다.’ 바람이 지난 호수처럼 일렁이던 눈동자. ‘좋아한다.’ 달의 곡선처럼 매끄러운 콧날. ‘좋아한다.’ 꽃의 혈흔처럼 붉은 입술. ‘좋아한다.’ 너의 모든 것을.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들의 가장 고결한 사랑과 우정 ‘누가 뭐래도…… 너는 귀한 사람이다.’ ‘꼭…… 그렇게 남아야 한다.’ + + + ‘네가 해.’ ‘……뭐?’ 비형은 한 번 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 눈이 여전히 윤을 향해 있었다. ‘최윤의 화랑.’ 길달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네가 해 달라고.’ 윤이 누군가의 봉로화가 되어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될 수 없다면, 비형에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결코 길달만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불행히도 오직 길달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네가 선택하지 않으면 나는 끝내지 않는다.’ ‘김비형!’ ‘어서.’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아름답던 복숭아꽃이 거친 폭우처럼 쏟아졌고 곳곳에서 술상이 엎어져 술과 음식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화랑과 봉화들은 바닥을 흥건히 적신 술을 피하느라 난리 법석이었다. 길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늬들 사랑싸움에 날 이용하는 거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거 아니다.’ 최윤의 화랑. ‘후회하지 마라.’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잦아드는 바람 사이로 길달이 걸어갔다. 고요한 들판 위를 걷는 듯 자유로운 걸음걸이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어느덧 윤의 옆에 선 길달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윤이 움찔하며 길달을 보았지만 길달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화랑들만, 특히 비형만 바라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윤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길달의 기다란 손가락이 들어왔다. 사이, 사이, 천천히, 강하게. “화랑 길, 봉화 윤을 나의 봉로화로 명하고 대노두 석찬의 가문을 품을 것을 신국의 화랑들 앞에서 선언한다.” 어긋난 세 사람의 시선 사이로 바람에 해진 연분홍색 복숭아꽃이 다친 나비처럼 가물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수혁이 그녀의 볼 쪽으로 입술을 바싹 들이밀었다."네가 진짜 미쳤지!"수인이 그의 정강이를 다시 한 번 발로 세게 쳤다. 그가 짤막한 신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이자마자 그녀는 문을 열고 수혁을 걷어차서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나가!"그녀는 손수건을 함께 내던지고는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띠,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수혁은 복도에서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다가 문이 완전히 닫히자 등을 기대고 섰다. 여자애가 힘만 세 가지고. 그는 정강이를 만지며 그녀가 내던진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코로 가져가 향기를 맡아 보았다. 손수건에서 그녀만의 냄새가 났다. 좋았다. 낯선 듯하면서도 익숙한 향기였다. 수혁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문 앞에 기대어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인은 문짝에 등을 기대고 깊은 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양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있었다. 뜨겁진 않은데 꼭 데인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예술 영화관 시네하우스.일주일에 한 번은 꼭 마주쳤던 남자.이름도,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모르지만가끔씩 날 보는 눈빛 하나만큼은 선명했던 남자.나는 그를 좋아했다.혼자 좋아했다.그런 줄로만 알았다.“이솔 씨, 여기 학생이었어요?”4년 후. 그를 대학교수로 다시 만나기 전까진.‘내 이름을 어떻게…….’통성명도 못 했던 그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우리 구면인데, 나…… 모르겠어요?”기적 같은 녹음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나는,아무것도 몰랐던 그대를 전부,전부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이솔.”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하던 솔을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괜찮냐?”저벅저벅 걸어온 지태의 넓은 가슴팍이 눈앞을 가렸다.“아니 뭐 언제 봤다고 울 정도로 좋아…….”“4년이요.”“…….”“4년이나 됐다고요.”연인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 게 민망해서가 아니었다.혼자만 좋아한 마음이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강도하’ 평론가와 ‘차세희’ 앵커는 현재 결혼을 전제로 4년째 열애 중이라고 밝혔다.」4년. 4년이라는 그 말 때문에.“선배. 선배가 좋아하는 그 사람,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고 했죠.”“…….”“내가 그렇게 해 줄게요.”순간 드륵, 강의실 문이 열리고 전화를 받듯 휴대폰을 들고 나오는 남자가 보였다.이름도 모르면서 4년이나 혼자 좋아했던 남자.창가의 빛이 어린 그는,오늘도 잔인하게 눈부신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솔은 이제 분명히 알았다.시선만큼 무의미한 것도,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이 오는 이변도 없다는 것을.“만나요, 우리.”그대는 나를,그대는 나를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사람을 믿지 못하던 여자와 사랑을 믿지 못하던 남자가서로를 믿게 되는, 그 눈부신 길목의 기적.그대는 나를,그대는 나를 역시,<그대는 나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