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 애처로운 사연에 갇힌 경국지색의 미인, 봉이 난데없는 해적들의 습격으로 외딴섬에 감금된 처지. 하나 기필코 만나야 할 천륜이 있었기에 죽음도 불사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지만 눈물겨운 발길은 이내 악귀 같은 사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오면…….” 잔혹한 검劍 속에 핏빛 전설을 간직한 해적들의 수장, 귀鬼 악다구니를 써 가며 도망치려 드는 이 여인. 지난날의 나를 닮은 그녀의 처절한 몸짓에 해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회한이 무시로 겹쳐서일까. 홀린 듯 여인을 향한 갈망에 사로잡혀 버렸다. “도망가지 못한다. 날 자극하면 네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반드시 떠나야 하는 여인과 기어이 막아서는 사내. 하지만 두 인연은 감히 짐작지도 못했다. 결코 스치지 말았어야 했던 그들의 원한 맺힌 운명을…….
<단심가>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연정을 접으려는 사내, 아령. 은밀히 여인을 상대하는 남기(男妓)의 삶에 지칠 때면 산에 올라 대금을 연주하며 그 설움을 풀곤 했다. 그리고 내 가락에 눈물짓던 여인을 만나게 된 그날, 나는 처음으로 한 여자의 사내로 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영의정의 여식. 신분을 속여서라도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점차 커지는 나의 욕심이 그녀에게 화를 입힐까 두려워 연모하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결국 내 치부를 드러내야 했다. “소인, 아가씨와 어울릴 수 없는 더러운 남기입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신분의 벽을 허물려는 여인, 은평. 산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듣게 된 대금 소리는 제 아픔을 알아 달라 말하는 서러운 그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 가락을 지어낸 사내의 처연한 눈빛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은 온전히 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세상 만인이 손가락질하는 비천한 남기.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애써 날 밀어내려는 그를 잡아 두기 위해선 결국 돈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 전두(纏頭)로 도련님을 사면 되겠습니까?” 서로의 심장에 녹아드는 단 하나의 사랑가.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이 세상에는 온전히 두 사람만 존재했다.
<폭군> 달빛마저 스러진 고요한 첫날밤. 군왕君王의 입가에 잠시 스친 평연한 웃음을 보며 늘 그려 왔던 어진 지아비의 온화함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 수려한 용안에 드리운 아름다운 미소가 금세 잔인한 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그 한 가지 사실만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술에 취해 세월을 허비하는 광인. 백성 따위 안중에도 없는 잔혹한 폭군. 비릿한 피 내음을 흘리며 사나운 야차夜叉의 형상으로 서 있는 그가 바로 오늘, 내 모든 것을 취해 갈 나의 주인이었다. “누구도 감히 내게 명령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중전.”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드러난 군주의 실체. 그 우악스러운 광풍 앞에 소리 없이 품고 있던 내 아둔한 믿음이 지옥의 벼랑 끝에 매달려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야수의 손이 작게 움츠린 어깨를 거머쥔 순간 실낱같던 희망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내 안에 숨 쉬고 있던 태고의 연약함이 잔인한 폭군의 침입에 구슬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