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매력적인 바람둥이 휘경. 부모 잘 만나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바람둥이 따위... 나랑 무슨 상관? 아르바이트와 학교생활을 병행하느라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은수에게 같은 과 선배 휘경은 그저 연예인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다른 여학생들과 달리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은수의 도도함에 휘경은 왠지 시선이 갔다. 은수가 무시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은수는 왜 남자 안 만날까?”“철벽도 정도껏 쳐야지 귀엽지.”“사근사근한 애들이 널렸는데 뭐 하러 굳이 피곤하게…….” 은수는 어느새 남학생들의 ‘로망’에서 ‘신포도’가 되어 있었다. 가질 수 없으면 더 탐이 나게 마련이었다. 휘경에게 있어서 은수도 그러했다.
가슴 졸이며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열일곱 살, 여고생이었던 하진에게 있어서 손찬영은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모든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던 그였기에. 그렇게 한 여름날의 꿈과 같았던 여고시절의 짝사랑은 다 끝이 난 줄 알았다. 스물아홉, 이제 더 이상 하진은 수줍은 여고생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여고시절의 짝사랑 손찬영. 세월은 흘렀지만 변한 건 별로 없었다. 유명 피디인 찬영은 무명의 방송작가인 하진에게 있어서 여전히 다가가기엔 너무 먼 그대였다. “봉암고등학교 나오셨네요?” 십 년만에 다시 만난 하진에게 찬영이 그녀의 이력서를 손에 든 채 물었다. “아... 네.....” “몇 년도에 졸업했어요?” 그 순간 하진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3년 동안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3년 내내 줄곧 그만 쳐다봤는데 그의 기억 속에는 강하진이라는 이름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듯 했다. 사실 우리 동창이야. 3년 내내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하진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창이라는 사실을 밝히기엔 지금 제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유명피디와 그에게 면접을 봐야 하는 무명의 작가... 이 현실이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보다 일 년 후배네요? 이런 데서 후배를 다 만나다니 반갑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하진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라는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목적지는 저기 보이는 저 엘리베이터! 저걸 놓치면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랬다간 지각은 확정이었다. “잠시 만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사라는 큰소리를 내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사라한테 쏠렸다. 순간 사라는 그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승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리베이터 문은 가차 없이 닫혀 버렸다. 사라는 겨우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2층에서 3층으로,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닫힘 버튼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이 진짜!” 그 남자, 한승원은 사라의 입사 동기였고, 한승원과 오사라가 상극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승원은 과묵했고, 이성과 논리를 중시했다. 사라는 그런 그를 비인간적이라고 여겼다. 사라는 그 반대였다. 떠들썩하니 오지랖이 넓었다. 덜렁거리느라 실수를 할 때에도 웃음이나 애교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재수 없어!” 하여간 최악이었다. 승원의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특히 여자들한테 인기는 많으면서 저한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을 죄다 거들떠도 안 보는 그 오만함이 제일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그 일이 벌어졌다. “추워요.” 사라가 승원의 품에 파고들며 중얼거렸다.“왜 이래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집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안아주면 말해줄게!” 이미 안겨 있잖아. 아까 춥다 그러면서 안겼고, 그때부터 줄곧 안겨 있었으면서! 평소 그렇게 쌀쌀맞은 얼굴로 쌩하게 굴더니, 술에 취하니 왜 이 모양이야? 아주 딴사람이잖아. 승원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사라를 꼭 껴안아주었다. 그런데 사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히죽거리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게 아닌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사라는 몸도 승원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사라의 팔은 승원의 코트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어 그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라의 다른 한 손은 금방이라도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버릴 듯 야릇하게 승원의 가슴팍을 훑어 내렸다. 칼 같은 성정이지만 돌부처는 못 되는 승원이기에 주정임을 알면서도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에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승원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을 눈치 챘는지, 사라의 손길은 더욱 대담해졌다. 사라의 손길이 보내는 은밀한 메시지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승원은 바보가 아니었다. 술기운과는 다른 종류의 열기로 승원의 몸이 후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지만,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사라를 과감하게 떼어놓지 못한 채 승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오사라 씨, 이제 말해주세요. 집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집에 안 갈 거예요!”“네? 아니, 아까는 집 주소 말해준다면서요?”“술 더 마실 거예요!” 사라가 고집을 피웠다. 난처해진 건 승원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욱여넣었을 때 이제 겨우 떨어졌나 싶었으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오히려 사라는 아까보다 더 진득하게 승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지섭은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한영물산 임회장의 셋째 딸인 순영과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심한다. 사생아인 순영은 친엄마와 일찍 사별하고 새어머니와 배다른 두 언니 밑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아왔다. 순영은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미국에서 석사까지 하고 온 잘난 남자가 자신과 결혼을 해준 것만으로도 그저 황송해서 지섭이 매일 야근을 하고 밤늦게 들어와도, 결혼한 지 열 달이 지나도록 각방을 써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저 이 집에서 쫓겨나 그 지옥 같던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 순영에게 시어머니 오여사는 이 집안 식구가 되고 싶으면 어서 아이를 가지라고 재촉한다. 그때부터 순영은 자신을 소 닭 보듯 하는 지섭을 어떻게 하면 제 방으로 끌어들일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섭이 이층 서재로 올라가기 위해 막 계단 쪽으로 돌아섰을 때였다. “안돼요!” 갑자기 달려온 순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섭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는 순영을 내려다봤다. “뭐하는 거야?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말을 해야 알아듣지.”“오.. 올라가시면 안돼요. 오늘부터는 저랑 같이 침실에서 주무셔야 해요.” 너무 기가 막혀 그저 웃음만 나왔다. “너 남자랑 여자가 한 방에서 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지섭의 질문에 순영이 눈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너무 겁 없이 들이댄다 했더니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들이댄 거였군.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 줄 알아?” 순영의 얼굴에 다시 고집스러움이 어렸다. “무슨 말을 하셔도 소용없어요. 지섭 씨는 오늘부터 꼭 저랑 주무셔야 해요.” 지섭의 입술 사이로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순한 앤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진짜 황소고집이네. “네가 옆에 있으면 내가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런 걸 고문이라고 하는 거야.”“왜 못 주무시는데요? 제가 지섭 씨를 못 자게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왜 못 자는지 궁금해? 알려줘?” 지섭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색이 감도는 것도 모르고 순영은 큰소리를 쳤다.“알려줘 보세요. 어디 들어나 보게요.”“좋아. 네가 알려달라고 했다?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후회는 무슨 후회요. 괜히 이층에 가서 자고 싶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순영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훅 들이쉬었다. 지섭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는 감촉이 너무 낯설어서 그녀는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뭐... 하세요?” 순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지섭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알려달라며....”
은행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서래는 입구에 서서 실내를 느리게 훑어보고 있던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한 눈에 봐도 이런 촌구석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그 싸한 표정. 남자의 눈빛은 그가 현재 느끼고 있는 기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노골적인 무시. 한 마디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저건 또 뭐야? 제가 뭔데 저런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는 거지? 보나마나 어떤 사연으로 잠시 이 마을에 들른 외지인일 것이다. 저런 외지인들을 다루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난 서래였다. 서래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려는 찰라,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온 건 은영이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남자는 은영의 친절마저도 전혀 반갑지 않은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긴 ATM 같은 것도 없나요?”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외모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와 섬세한 이목구비, 길고 호리호리한 몸매.... 이 시골마을에서는 여자들 중에서도 이런 미모를 찾기가 힘들었다. “네, 고객님. 아쉽게도 ATM은 없습니다. 대신 통장이나 신분증이 있으시면 창구에서 인출이 가능하십니다.”“통장은 없고 카드만 있는데 이걸로도 가능한가요?”“그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시려면 읍내까지 가셔야 해요.” 읍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인상을 팍 찌푸렸는데도 못나지기는커녕 오히려 잘생긴 이목구비가 더 강조된다는 게 참 신기했다. 두 사람 앞에서 한동안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남자는 앞에 있는 두 여자를 싹 무시하고 돌아섰다. 저 싸가지 좀 보소. 내 그럴 줄 알았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인상이 아주 안 좋더라니. 생긴 건 아주 멀쩡한데 인성이 아주 바닥이야.“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요. 저 사람 있잖아요, 저 마을 제일 안쪽에 있는 별장, 그 별장집 아들이에요. 왜 하필이면 이런 날 마주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화장이라도 좀 하고 있는 건데.” 이 마을에 서울 유명한 재벌가의 회장님이 지어놓은 별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은 해서 뭐하게? 그런다고 뭐 저런 사람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라도 가질 줄 알아?”“그야 또 모르죠.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혹시 알아요? 제가 또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지?”